오늘의 화두는 '고통의 그릇'입니다. 고통은 나를 성장시키는 인생의 비료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인파산'과 개인회생'이란 길이 있는데도 돈 때문에 그 귀한 목숨까지 버립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을 조금만 생각하면 나의 존재적 가치를 생각할 수 있는데도, 사랑 때문에 그 귀한 목숨을 버립니다. 세상의 반은 여자, 세상의 반은 남자인데, 당장 눈앞에 보이는 한 사람과 이별한 것을, 마치 세상 전부를 잃은 것이라고 괴로워하다가 끝내 삶을 포기합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장점과 단점이 뒤바뀌는 게 세상 이치인데, 내 인생의 주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며 타인을 의식하다가 결국 명예 때문에, 자기 가족의 안위보다 유력 정치인을 보호한다는 명분 때문에, 좋아하는 존재의 파멸을 막는다는 팬덤의 측은지심 때문에, 조직을 지키고 의리를 지킨다는 공명심 때문에, 조금만 움직이면 얼마든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존귀한 존재인데도 신병 비관 때문에 그 귀한 목숨을 버립니다.
매일 앉아만 있으면 없던 병이 생깁니다. 우울증도 심해집니다. 집 밖을 걸어야 넓은 세상이 보입니다. 잠자는 의식을 깨워야 영성의 그릇이 커집니다. <소금과 저수지> 관련 글을 통해 자각을 공유합니다.
"나이 들고 현명한 큰 스님이 젊은 스님을 제자로 받았다. 그런데 그 제자는 모든 일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스님은 젊은 제자를 불러 소금 한 줌과 컵을 가져오게 했다. 소금 한 줌을 컵에 넣고 물을 섞어 마시게 하자, 얼굴을 찡그렸다. 큰 스님이 제자에게 물었다. "물 맛이 어떤가?" "짭니다." 다시 소금 한 줌을 가져오게 하고 근처 저수지로 갔다. 잠시 후, 큰 스님은 소금 한 줌을 저수지에 풀어놓으라 했다. 저수지 물을 마시라고 했다. "물 맛이 어떠냐?" "시원합니다." 그러자 큰 스님이 말했다. "인생의 고통은 순수한 소금과 같다네. 하지만 짠맛의 정도는 고통을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지지. 만약 고통 속에 있다면, 컵이 되는 것을 멈추고 스스로 저수지가 되게나." 스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풍경소리로 되돌아왔다."
- 정유지, 「소금과 저수지」 일부
인용된 이야기는 마크 네포의 『고요함이 들려주는 것들』 일부를 각색해서 패러디한 것입니다. 마음의 크기가 작으면 그 어려움은 더 크게 몰려옵니다. 넉넉한 마음을 가지면, 충격력을 쉽게 흡수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넘어가게 됩니다.
사람은 고통스럽지 않은 적이 없는 존재입니다. 고통을 담아내는 그릇에 따라, 포기란 놈은 고통을 담아내는 그릇이 클수록 얼씬도 하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 사랑, 명예보다 귀한 게 건강이고 생명입니다. 너그러워지는 물의 덕처럼 넉넉한 마음그릇을 키워봅니다.
고통을 담아내는 그릇은 마음먹기에 달렸지요. 내 안에 저수지를 들여 고통이란 말조차 사라지게 만들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