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by 정유지

안개

철로 위로 거대한 스모그가 피워 오른다


아직 축축한 거리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 컨테이너 부두의 기적소리가 부산역 광장을 통과한다, 가슴이 크고 아름다운 글래머의 여성이 발에 밟힌 채 발악을 한다, 아, 비명소리 신음소리 몇 장 찢기고 뜯긴 채 바람은 한 장 남은 플레이보이를 날려 보낸다, 2차 3차 4차로 향하는 취객들의 기침소리가 검푸르고 차갑게 굳어져 버린다, 119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세상에 대한 믿음과 절망이 순간순간 교차한다, “자식이 생활고를 못 이기고 공원에 치매든 아버지를 버렸다”는 멘트에 이어 “신호등을 무시하고 질주하던 아베크족 커플이 음주운전으로 어린아이를 치고 도주하다 잡혔다”는 YTN 이 시각 주요 뉴스가 24시간 편의점에 잠시 머물다 나간다, 주차된 자동차의 윈도브러시마다 24시간 출장마사지, 폰팅, 무보증 대출, 100% 부킹이 새겨진 명함과 전단지가 빽빽이 꽂혀 있다, 아, 고독을 간직한 채 뒤틀린 노인의 척추처럼 세계는 타원형으로 거대하고 느리게 휘어진다, 휘어지는 빗줄기, 휘어지는 낙엽, 휘어지는 허리, 휘어져 겹쳐진 남자와 여자, 직선으로 가다 결국 휘어지고 마는 습성, 노숙인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흩어진다, 야, 닭대가리 같은 것들, 휘어지는 것이 무슨 편법! 골목에서 잠복하던 경찰로부터 불심검문을 받았다, 신분증이 건네진 후, 순찰차에 태워졌다, 조회 결과 주민등록상 존재하지 않는 신원미상으로 뜬다는 이유였다, 얼마 전 카드사로부터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통보 그 자체로 모든 법적 제재가 끝나는 줄 알았다고 진술하는 순간, 안개로 새롭게 제작된 주민증이 발급된다,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안개를 선택한다


안갯속 신용회복가능 전광판이 잘린다


- 정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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