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우를 만난 것은 늦은 오후였다.
여름의 밤은 빨리 다가오지 않았기에 하늘은 푸른색으로 가득 차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오늘따라 길게 늘어져 있는 골목의 벽을 지나
왼쪽으로 발을 돌리려고 할 때 불쑥 사람의 형체가 길을 막아섰다.
정오를 가리키는 시계처럼 우리는 작은 발 하나와 긴 발 하나가 딱 맞아버렸다.
몸을 틀어 옆으로 가야 하지만 어째선지 앞의 사람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1분과 같은 1초에 세상에서 멈춰버렸다.
"뭐야. 어디 가냐?"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말투, 세상이 다시 움직이는 것일까.
차마 고개를 들어 올리기에는 아직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눈동자만 위로 치켜들었다.
"뭐야!"
또 다른 멈춤이었지만 이번엔 온 세상이 움직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종우와 맞닿은 발이 떨어지며 적당한 거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대략 한보가 부족한 공간이 생기고 나서야 눈동자와 머리를 같은 위치로 맞출 수 있었다.
나보다 조금, 정말 조금 큰 종우는 언제나 같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본다.
살이타서 진한 황토색의 피부를 가진 종우. 짧은 머리와 좋은 땀냄새가 풍겨오는 사람이다.
분명 땀냄새는 악취에 가까운 냄새가 아니었나.
어째서 코로 들어오는 종우의 냄새는 역하지 않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가
팔에 코를 묻어놓고 싶을 정도의 향기가 풍겨왔다.
"갈 때 없으면 같이 바다나 보러 갈까?"
난데없는 그 말에 '싫어'라는 말이 나왔어야 하는데 오늘은 어째선지 '좋아'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한보가 부족한 공간을 유지한 채로 종우와 함께 하얀 등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테트라포트."
그냥 방파제라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텐데도 종우는 항상 테트라포트라는 말을 자주 한다.
원형의 기둥들 3개가 중심을 가지며 합쳐지면 어설픈 삼각형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서로 맞물린 듯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걸쳐져 있기도 했다.
"너는 왜 항상 테트라포트라고 말하는 거야? 그냥 방파제나 아님 돌탑정도로 불러도 대충 이해는 가잖아."
"그냥. 테트라포트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니까."
이 아래에 쌓여있는 테트라포트처럼 제멋대로인 종우의 말은 어이가 없었지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얀 등대에 도착하고 나서야 하늘도 색을 바꾸고 있었다.
늦은 오후가 지나가고 밤의 시작을 알리듯 하늘은 어두운 파란색으로 변하가다
수평선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노을빛이 덮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를 지나가는 하얀 물결구름들은 하늘의 색과 노을의 색이 섞이자
빨갛게 빛나기도 하고 옅은 보라색으로 물들기도 했다.
그림 같은 하늘의 모습은 잔잔한 물결이 일고 있는 바다에 비쳤다.
조용히 바다아래를 바라보는 종우의 눈빛은 고요했다.
밤의 경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지만 아직은 이르기에 몇 번이나 불었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한다.
멈출 때마다 테트라포트 아래에 부딪치는 작은 파도 바람에서 비릿한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다시 밤의 바람이 불 때까지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돌렸는데 한번 더 온 세상이 멈춰 보였다.
지그시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는 방금 전 바다에 물든 하늘의 색을 보고 있던
고요의 주인이 나를 담아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들면서도 셀렘으로 가슴이 가득 차기도 했다.
지금의 분위기에 숨이 머질 것 같은 답답함도 함께 느껴졌다.
숨 쉬는 것마저 조심스럽게 이어갔다.
얕게 뱉고 작게 들이마셨다.
"예쁘다."
눈동자에 담아내고 있는 것은 어두워지는 하늘도 아니었고 본래의 색을 찾아가는 바다의 모습도 아닌
이 사이에 끼어있는 나를 바라보며 종우는 말을 꺼냈다.
점점 다가오는 종우의 모습이 설마 내가 움직이고 있는 건가 싶은 착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우리의 거리는 서로의 체온이 닿을 듯 말듯한 거리로 좁아졌고
이제는 손가락 한마디 정도 부족한 공간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