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작품을, 그러니까 하나의 예술을 그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는 시선을 지니고 있는 인간들이 너무나도 많고 그러한 언행으로부터 파고드는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렇지만 이대로 모든 것을 그저 바라보기에는 너무 한심하지 않을까? 특정 인간이나 문명의 책임이라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부터 근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일까? 정밀하게 파악을 해서 전적으로 전도를 시킨다고 해도 지금은 때가 너무 늦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현재 시점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개인의 역량이 아닐까? 그런데 이조차 결여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작품을 작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보는 눈은 맹인이 되어 울부짖고 있다. 울부짖는 소리는 그 어떠한 인간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앞을 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고 있으므로 귀를 닫고 있으므로 듣지도 못하는 귀는 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특정 분야에 장점을 지니고 있는 인간들이 있다. 그와 반대로 단점을 지니고 있는 인간들도 물론 존재한다. 장점을 지닌 인간들은 더욱 더 괴로움을 지니고 있다고 어느 한 독일인은 주장을 했는데 전적으로 동의를 하는 바, 장점이 더 이상 장점이 아니게 된 경우 장점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의 존재 자체가 추락하는 것도 심상치 않게 발견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음, 기계 부품 따위에 나사를 조립하여 완전하게 작동을 하도록 결함만 생기지 않도록 최우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 외 어떠한 목적도 목표도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인 것 같다. 그저 기게만 작동이 되면 된다! 다수의 인간들은 그저 이렇게 바라기만 한다. 다른 것은 절대 바라지도 않는다. 설령 바라는 인간이 있다고 해도 표현을 하지 못한다! 표현을 하면 그 인간은 그 즉시 그 자리가 무덤이 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자세하게 그리고 명민하게 파악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자기 자신이 서서 있는 자리가 그 즉시 무덤이 된다면 누가 발언을 기꺼이 할까?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은 근저에서 너무나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서 슬프지만 아무런 힘이 없는 인간은 그저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경멸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드넓은 어느 공간 따위가 아니라 아주 좁은 실내에서...
특정 분야 따위를 철저하게 유리를 시키니까 더욱 흥분하게 되는 효과를 지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일종의 발작이 일어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을 할 수 있다. 우리는, 특정 언행을 하는 인간을 보고 더욱 더 흥분을 하기도 한다. 발정난 동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이 차이가 있을까? 모든 것을 그저 억압하는대로 있는 그대로 수용을 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있는 세상에서 무엇이 허용이 되고 무엇이 불허가 되는지 더욱 더 철저하게 파고들거나 따지고 난 뒤 결과는 무엇이 남는다는 말일까? 예의? 도덕? 범절? 무사고? 하지만 여전히 십자가는 곳곳에 땅에 박혀서 뽑히질 않지 않을까? 가정을 해보자!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눈 앞에 있는데 칼이라는 사물이 아직 없다면 우리는 이 매듭을 어떻게 끊어야 할까? 칼이 없고 총도 없다. 온갖 무기나 흉기라고 불리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매듭을 끊으려고 시도를 하고 노력을 할 것인가? 인간의 치아 따위로 끊으려는 어리석은 판단은 하지 않지 않을까?
솔직하게 표현을 하면 나는 동쪽을 경계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동경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동쪽을 바라보고 편견을 지니는 것을 넘어서 더욱 더 훌륭한 개인으로 발달을 넘어서 발전을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고통을 수반하는 것은 자명하다. 현재까지 여겨졌던 불변했던 것으로부터 탈피는 죽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죽었다가 깨어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버겁다는 것을 어느정도는 인지하고 있다. 감히 바라건데, 일단 과감하게 죽는 것을 선택하는 것도 전혀 나쁘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죽음을 바라봐야 생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