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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Feb 29. 2024

펑더화이, 시안에서 베이징으로

중국현대사(29)-한국전쟁(2)

펑더화이, 시안에서 베이징으로  

펑더화이

1950년 10월 4일, 펑더화이는 섬서성(陕西省) 시안(西安)에서 건국기념일(국경절) 1주년 휴일을 막 끝낸 후 ‘서북군정위원회’ 회의실에서 대서북 지구 경제발전 문제를 주제로 한 간부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당시에 펑은 중공중앙 서북국 제1서기와 서북군정위원회 주석, 서북군구 사령원과 정치위원 직을 겸하고 서북 지구 5개 성을 포함하는 ‘대서북(大西北) 지구’의 경제 건설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에 베이징의 중앙판공청(中央辦公廳)에서 파견한 두 사람이 전용기로 시안(西安)공항에 착륙했고, 즉시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펑더화이가 있는 서북군정위원회 사무실로 왔다.

이때 펑더화이는 신장(新疆) 지구에 진입·주둔하고 있던 군부대 간부의 보고를 듣고 소수민족들과 융화하는 문제 등에 대해 보고·토론하는 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오전 회의가 끝나갈 때쯤 펑의 군사비서 양펑안(楊鳳安)이 베이징에서 온 손님들을 대동하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 분은 중앙판공청의 리 동지입니다. 마오 주석이 현재 베이징에서 중앙정치국 회의 중에 장군을 비행기로 모셔오라고 했답니다.”


“그렇게 급한가?”


펑더화이가 놀라며 말하자 중앙판공청에서 온 이들이 말했다.


“현재 중앙정치국 회의 중인데 마오 주석께서 즉시 펑총(彭總)을 모셔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점심 식사 후 비행기 편으로 베이징으로 가야 합니다.”


“알았네, 점심 먹고 곧 출발하지.”


펑이 대답하고 경제 비서인 장양우(張養吾)에게 중앙에 보고할 관련 문건을 챙기라고 지시했다. 당시에 펑은 급하게 베이징으로 가지만 며칠 후면 시안(西安)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베이징에서 바로 조선 출병 부대 총사령이 되어 출병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펑더화이는 베이징에서 진행되는 회의 주제가 경제 관련일 거라 생각했기에 군사 비서가 아닌 경제 비서 장양우에게 자신을 수행토록 했다. 베이징을 향해 이륙한 전용기 창가 자리에 앉은 펑더화이는 그때까지도 중앙정치국 회의 주제가 ‘3년 경제건설계획’ 수립과 관련된 것일 거라 짐작했었다.

그러나 그는 산전수전 다 겪어온 군인이었다. 비행기 창밖으로 창공의 구름을 바라보던 중에 자연스럽게 약 세 달 전에 조선반도에서 발발하여 진행 중인 전쟁 상황을 떠올렸다. 특히 약 반달 전에 미군이 인천 상륙 후, 미8군은 육로로 북진 중이고, 미10군은 원산에 상륙, 그리고 남조선 제1, 제2군단은 동해안과 중부전선으로 북진하고 있다는 조선반도의 전황과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인 중국과 북한 접경 만주지구에 미칠 영향 등을 떠올렸다. 그러자 현재 베이징에서 진행 중인 정치국 회의의 주제가 조선전쟁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펑은 군사비서 양펑안이 준비해 준 조선 지도책을 찾아 펼치고 중조 접경지역에서 38선 부근까지의 지리 등을 살펴보고 있었다.



펑더화이, 중앙정치국 확대회의 참석

오후 4시경 베이징 시자오(西郊)공항에 도착한 펑더화이는 대기 중인 차를 타고 정치국 회의장인 중난하이(中南海)로 달렸다. 펑을 태운 차가 장안가 중난하이의 남문 신화문으로 들어서서 펑쩌위안(豐澤園) 입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펑더화이가 회의장소인 이녠당(颐年堂) 앞으로 걸어가자 총리 저우언라이가 펑더화이를 반기며 말했다.


“펑총, 회의는 오후 3시에 시작했네, 회의가 매우 급하게 결정되었고, 어제 비행기를 보내려 했는데 날씨가 안 좋아서 오늘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네, 너무 촉망하게 진행해서 미안하네.”


저우언라이는 펑더화이에게 특별한 신세를 진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1935년 홍군의 ‘장정’ 시기에 저우언라이는 간염 증상과 고열로 인해 도저히 자력으로 초원과 늪지대를 걸어서 통과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당시 홍3군단을 지휘하고 있던 펑더화이가 특별 지시하여 천겅(陳賡)을 책임자로 하는 특수팀을 조직하여 저우언라이를 일주일간 들것에 태워 초원과 늪지대를 통과다. 당시 저우언라이가 이렇게 말했다.


“라오펑(老彭)은 나의 형제이다.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펑더화이가 저우언라이와 함께 회의장에 들어서자 마오쩌동과 정치국 위원들이 모두 일어나 펑과 악수를 했다. 마오쩌동이 반기며 말했다.


“펑총, 급히 오느라 고생했다, 미군이 이미 38선을 넘었고, 김일성이 우리에게 출병을 요청했다. 현재 이 문제를 토론 중이다. 펑총은 이제 왔으니, 우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봐라.”

정치국 확대회의 장면(그림)

이날 정치국 확대회의에는 당정군의 주요 간부들이 대거 참석했다. 정치국 위원으로 마오쩌동, 주더,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런비스, 천윈(陳雲), 캉셩(康生), 가오강(高崗), 펑전, 동비우, 린보취, 덩샤오핑, 장원톈(張聞天), 린뱌오, 리푸춘(李富春)이 참석했고, 중앙판공청 주임 양상쿤(楊尚昆), 총참모장 니에롱전, 중공중앙 신문서(新聞署) 서장 후차오무 등이 참관자로 참석했다.


자리에 앉은 후 펑더화이는 즉각 회의 분위기가 매우 엄숙하다는 걸 감지했다. 수십 년간 동고동락하며 전쟁터를 누볐던 주더 사령관조차도 그를 보고 인사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악수만 한 사람도 있었고, 자리에 앉고 난 후에 엄숙한 표정으로 눈을 맞추고 고개만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최근 수일간 연이어 깊은 생각과 고민으로 눈자위가 꺼지고 매우 피곤해 보이는 마오쩌동이 회의를 주재했고, 저우언라이가 상황 보고를 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전에 우리는 미군이 38선까지 점령한 후에 북진을 멈추고 외교상의 담판으로 전환될 가능성 여부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미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에는 38선을 넘지 않을 거란 정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38선을 넘었고 오늘도 북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니에롱전이 덧붙여 발언했다.


“남조선군은 이미 38선 이북으로 깊숙이 들어왔고, 압록강으로 북진하고 있습니다. 미군 비행기가 압록강 상공에 나타난 건 이미 오래전이고 우리 국경 도시들도 수차례 폭격했습니다.”


저우언라이가 이어서 말했다.


“김일성은 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할 준비를 하고 있고, 10월 1일에 외무상 박헌영을 통해 우리의 출병 지원을 갈망한다는 김일성, 박헌영의 공동 친필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회의장에 일시 침묵이 흘렀다. 회의 참석자들이 적극적으로 발언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오쩌동이 말했다.


“조선 지원 출병 문제에 관해 불리한 점과 유리한 조건을 이야기해 주시오.”


그러자 린뱌오가 느린 말투로 발언했다.


“출병의 불리한 조건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20여 년간 전쟁을 했고 국내 전쟁 피해 복구와 치료가 시급합니다. 일부 지구는 아직도 국민당 잔당 세력권하에 있고 새로 해방된 지구에서는 아직 토지혁명투쟁도 진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건국한 지 이제 1년밖에 안 됐습니다. 아직 국력이 쇠약하고, 수백 가지 문제가 해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미국과 겨뤄본 적이 없습니다. 출병, 참전해서 전쟁을 수행하게 되면 한계선이 없어집니다. 만일 미군을 물리치지 못하면 전쟁의 불똥을 만주지구에까지 끌어오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정말 낭패입니다. 차라리 만주의 방위를 강화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오강(高崗)이 덧붙여 말했다.


“단독으로 출병하는 것보다 소련 적군(赤軍)이 직접 참전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같이 전쟁하는 게 좋겠습니다.”


린뱌오가 다시 일어나서 말했다.


“미군은 방대한 육해공군을 보유하고 있고 공군과 해군이 강하고 원자탄도 가지고 있고, 또한 든든한 공업 기초도 있습니다. 조선은 겨우 수백만 인구이고, 중국은 5억 인구입니다. 인구 5억의 국가를 박살내면서 수백만 인구의 조선을 구하는 게 수지가 맞겠습니까?”


니에롱전은 후에 당시의 회의 분위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마오 주석을 제외한 회의 참가자 모두의 의견은 정말로 피할 수만 있다면 이 전쟁은 안 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날 펑더화이는 한마디도 발언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마오쩌동은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은 후 회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지들 말 모두 일리가 있다. 단, 친구의 국가가 위급 상황에 처해 있는 시각에 우리는 한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자니 어찌 되었건 마음이 몹시 괴롭다.”


걸출한 전략가였던 마오쩌동은 동시에 매우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후에 펑더화이는 마오의 이 말에 매우 감동하고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마오쩌동의 고민

마오쩌동은 이미 10월 1일과 2일 저우언라이, 주더 등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논의하고 밤잠을 못 자며 고민했으나 마음속으론 이미 출병을 결정한 상태였다.

마오가 북조선을 “친구의 국가”라고 부른 데에는 항일전쟁과 연이어서 진행된 국민당군과의 내전에서 팔로군과 동북항일연군 소속 조선족 장병들 용감하고 헌신적으로 투쟁한 것또한 만주전쟁이 진행되던 그 당시에 이미 조선반도 북부를 장악하고 있던 김일성 정권의 적극적 지원을 받으면서 관건 전투였던 만주지역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기 땨문이었다. 그것이 마오쩌뚱이 그토록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선 출병을 결심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연변대학 정문

그 상징적 사례가 마오와 중공중앙의 영도자들이 조선족 지도자들의 요청을 수락하여 중공정권 출범 6개월 이전인 1949년 4월에 연변(延邊) 조선족 자치주 내에 중국 내 소수민족 중 최초로 민족대학인 연변대학(延邊大學) 설립 및 개교를 비준 및 지원해 준 것이다. 정권 출범 6개월 전에 소수민족 대표의 요구를 적극 수용해서 그 민족의 자치지구에 소수민족을 위한 대학을 설립해 준 것이다.


10월 4일 정치국 확대회의는 저녁 7시경까지 계속되었다. 회의를 끝낸 후 마오가 펑더화이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펑총(彭總), 오늘 베이징에 도착해 바로 회의 참석하느라 쉬지도 못하고 매우 피곤할 거다. 오늘 밤 잘 쉬고 내일 오전에 다시 내 서재에서 단 둘이 출병 문제에 대해 의논하자.”


베이징호텔


잠 못 이루는 펑더화이

숙소인 베이징호텔에 돌아온 펑더화이는 이런저런 생각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처음에는 호텔 침대가 너무 푹신해서 습관이 안되어서 그럴거라 생각하고 바닥 카페트에 요를 깔고 누워서 잠을 청했으나 그래도 잠이 안와서 밤새 뒤치락 거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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