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이 조선에 파병한 이른바 ‘중국인민 지원군’의 최초 지원자는 마오쩌뚱의 장남인 마오안잉(毛岸英)이었다. 마오쩌동이 조선 파병과 펑더화이를 파병군 사령관으로 결정하고, 10월 7일 저녁에 중난하이 펑저원(豐澤園)에서 펑더화이를 위해 개최한 만찬 자리에 배석한 안잉이 펑더화이에게 자신도 지원군의 일원으로 조선에 가겠다고 신청했고, 마오쩌뚱도 이에 동의했다.
당시에 펑더화이는 안잉의 조선행에 대해 반대했으나, 안잉이 거듭 요청하고 마오쩌뚱까지 권해서 마지못해 총참모부에서 자신의 러시아어 통역관 역할을 맡기기로 하고 승낙했다.
안잉의 참전 결정은 펑더화이뿐만 아니라 마오쩌뚱이 의견을 구한 장칭(江青), 저우언라이 등 주변 사람 모두가 반대했으나, 마오는 “안잉이 원하고 요구하니 나는 그를 지지해야 한다. 내 아들이 안 가는 전쟁터에 누구에게 가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마오안잉의 죽음
그러나 안잉은 조선 전쟁터에 파병된 지 34일째 되던 1950년 11월 25일 오전에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의 동굴 안에 있던 작전실 안에서 전투 전보를 발송하던 중에 미군 폭격기 두 대가 발사·투하한 네 발의 네이팜탄 중 하나에 피격되어서 사망했다. 28세였다. 안잉의 전사 소식을 당일 펑더화이가 전보로 베이징의 저우언라이에게 보고했으나, 보고를 받은 저우언라이는 그것을 마오에게 즉시 보고하지 않았다. 차마 그러지 못했다.
마오안잉과 류쓰치(劉思齊) 부부
마오쩌뚱의 비서 예즈롱(叶子龙)이 저우언라이가 전해온 펑더화이의 전보와 저우언라이의 보고 편지를 받았을 때는 안잉이 죽은 후 한 달도 더 지난 1951년 1월 2일 오후였다. 그 전날에 펑더화이로부터 38선을 넘어 남진하여 서울을 다시 점령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저우언라이는, 이제는 마오에게 승전보와 함께 안잉의 전사 소식을 보고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하고 류샤오치와 의논했다. 두 사람 모두 이 건을 계속 숨길 수는 없다고 의견을 모았고,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뚱과 장칭 앞으로 안잉의 전사 소식과 보고가 늦게 된 이유와 경위를 편지로 써서 예즈롱에게 전했다.
다음 날(1950.1.2) 오후, 예즈롱이 저우언라이의 편지와 펑더화이가 한 달여 전에 보낸 전보를 들고 당시 마오가 가족과 함께 거주하던 신6소(新六所)에 들어섰다. 신6소는 중공중앙 영도 간부들의 거주 조건 개선을 위해서 베이징 시완서우로(西萬壽路)에 건조한 6개 동의 작은 건물로, 5인의 중공중앙 서기 가족이 각 한 동씩, 업무 인원이 나머지 한 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마오는 긴박한 업무가 없을 때에는 이곳에 와서 며칠간 머물면서 가족들과 함께 휴식을 취했다.
예즈롱은 장칭이나 마오에게 직접 가지 못하고 먼저 경호대장 리인차오(李银桥)를 찾아갔고, 리인차오와 함께 마오가 거주하는 신6소 1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예즈롱은 회고록에서 마오가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오후 늦게 일어나서 밤에 일을 하는 습관을 가진 마오는 그날(1950.1.2)도 오후 늦게 기상하여 소파에 앉아서 그날의 ≪인민일보≫를 보면서 유성기에서 나오는 경극 '우자포(武家坡)'를 듣고 있었다.
장칭이 예즈롱과 리인차오와 함께 마오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에 마오는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즈롱, 그렇지 않아도 너를 부르려 했다. 안잉을 데려와야 할 것 같다. 안잉이 쓴 이 문장을 봐라. 진보는 고사하고, 퇴보했다.”
그러나 예즈롱에게서 아무런 대답이나 반응이 없었다. 마오가 고개를 들고서 보니 예즈롱이 침통한 표정으로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다.
“즈롱, 무슨 일이냐?”
마오가 민감하게 묻자 예즈롱이 마오에게 저우언라이의 편지와 펑더화이가 한 달여 전에 보낸 전보를 건네 주었다. 마오의 표정이 누렇게 굳어지고 침묵이 흘렀다. 전보 내용은 짧고 간단했으나 마오는 그것을 침통한 표정으로 계속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고 자신의 바로 앞 탁자 위에 있는 성냥갑을 두고 주머니를 뒤지며 성냥갑을 찾았다.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경호대장 리인차오가 탁자에서 성냥갑을 들고 담뱃불을 붙여주었다.(후에 예즈롱은 CCTV 인터뷰 도중 이 대목을 회상하면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연달아 두 개비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끈 후에 마오가 목 메인 소리로 말했다.
“전쟁에선 늘 다치고 죽는 거지, 누가 그 애를 마오쩌뚱의 아들이라 하겠느냐……, 안잉은 정말 고생 많이 했다. 좋은 시절 보낸 게 며칠이 안 되는구나……. 어려선 엄마를 잃고, 그리고 전쟁터에서 죽고…….”
양카이후이(楊开慧)와 마오안잉(우측)
마오는 쓰린 가슴으로 아들 안잉과 안잉의 엄마인 첫째 아내 양카이후이(楊开慧, 1901~1930년)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마오가 징강산에 들어가서 토비혁명가로 근거지를 구축하고 있던 시절에 양카이후이가 후난성(湖南省) 국민당 군벌에 체포되어 끌려갈 때 어린 안잉도 울면서 엄마 따라 같이 갔다. 엄마와 같이 창샤(长沙)의 감옥 안에서 살았고, 엄마가 모진 고문을 받고 총살당한 후 동생 안칭(岸靑), 안롱(岸龍)과 함께 외할아버지 집으로 보내졌다.
그 후 중공 지하조직이 이 형제를 상하이로 옮겼으나 막내 안롱은 상하이 도착 직후에 실종되었고, 안잉과 안칭은 상하이 당 조직이 위기 상황에 처하면서 방치되었다. 안잉은 동생안칭을 데리고 수년간 상하이 시내에서 유리걸식, 신문팔이, 인력거 끌기 등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고, 후일 중공 지하조직이 이 두 형제를 상하이 거리에서 찾아내 소련 모스크바로 보냈다.
중공군, 서울 점령
그날은 마오쩌뚱, 장칭 부부와 두 딸과 며느리인 안잉의 아내 류쓰치(劉思齊)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마오 부부는 다른 가족, 특히 당시 20세의 며느리인 류쓰치에게는 당분간 이 소식을 비밀로 하기로 하고 내색하지 않은 채 저녁 식사를 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고 마오가 전화기를 들자 저우언라이의 음성이 들렸다.
“주석, 조선의 지원군 사령부에서 전보가 왔습니다. 그제 제3차 전투를 발동했고, 순조롭게 진행되면 이틀 정도면 38선을 넘어서 서울을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말을 들은 후, 마오는 마치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흥분하면서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새해 최고의 선물이군, 덩퉈(鄧拓)(≪인민일보≫ 편집 책임)에게 사설을 준비하라고 하게.”
마오가 말한 "이것"이 우리가 ‘1·4 후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당시 마오의 나이는 5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