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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May 14. 2024

한국전쟁, 주요 전투와 정전협정

중국현대사(32)-한국전쟁(5)

5차례 큰 전투

펑더화이, 한국전쟁

조선으로 출병한 후 중공군은 모두 5차례 큰 전투를 치렀다. 1950년 10월 24일 신의주와 평양 중간의 운산에서 중공군의 기습 공격으로 진행된 1차 전투에서 패한 연합군과 남한 국방군은 압록강 변에서 남쪽으로 평양까지 후퇴했고, 2차 전투에서는 더 남쪽으로 38선까지 200km를 후퇴했다. 1950년 12월 31일부터 이듬해 1월 8일까지 벌인 3차 전투에서는 중공군이 서울을 다시 점령하고 북위 37도선인 평택-원주-삼척 선까지 내려왔다.


단동, 항미원조전쟁기념관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단동시내 북측에 항미원조전쟁기념관이 있다. 이곳에서 당시 중공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는 모습의 사진 등을 보면 중공군의 장비와 무기 등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군과는 비교조차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음을 알 수 있다. 

말이 끄는 마차에 대포를 싣고 미군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한밤중에 산길로 이동하는 중에 폭격으로 산길 중간이 파여 큰 구덩이가 있으면 구덩이 양 끝에 목판을 대고, 대포를 실은 마차가 무게를 견디고 건너갈 수 있도록, 병사들이 구덩이 밑으로 들어가서 목판 밑에서 손과 등으로 목판을 받치고 있는 방법으로 마차를 통과시키기도 했다. 

또한 중공군은 공군력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약 200km에 달하는 땅굴과 참호, 연결 교통로를 구축하고 야간전투 위주로 행동했다. 그들은 매복과 기습에 강했다. 


당시 중공 지원군과의 전투를 경험한 미군 사병 출신 인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진격해 올 때는 마치 일본군의 가미가제 같았다. 그들은 생명에 대한 애착이나 존엄, 죽음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이 없어 보였다."


연합군과 남한 국방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1951년 1월 4일에 다시 서울 이남으로 후퇴했다. 이후 소련도 공군을 파견하여 지원했고, 중공은 소련의 지원 아래 1949년 11월 11일에 공군을 창설했고 공군의 역량을 적극 강화했다. 

인천상륙 작전 성공 후 UN 연합군과 국방군이 북진하는 상황에서 맥아더는 “성탄절 이전에 한국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 후 장병들과 같이 귀국해서 성탄절을 보내겠다.”고 호언 장담했었다. 펑더화이는 정보 파악 시, 옆에 있던 참모에게 “성탄절이 뭐냐?”고 묻고, “헛소리”라 했다 한다. 정작 그해 성탄절에는 귀국한 미군 지휘관은 시체로 본국 송환된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었다. 워커는 2차 전투에서 자신 휘하의 부대가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참패한 후 전선을 시찰하다 타고 있던 지프차 전복사고로 사망했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지휘관중 최고급 장성인 그의 죽음을 기려서 명명한 것이 현재의 워커힐 호텔이다.  



펑더화이와 김일성의 언쟁



연합군과 남한 국방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1951년 1월 4일에 다시 서울 이남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3차 전투 이후 연합군과 한국군의 퇴각은 전쟁 발발 초기에 혼비백산하며 밀린 것과 달랐다. 즉, 맥아더의 후임 리지웨이(M. B. Ridgway)의 지휘와 작전계획에 따른 계획적 후퇴였다.


펑더화이는 3차 전투 승리 후 점령한 서울에서 퇴각하는 미군과 남한 국방군의 형세를 분석한 후, 이들이 1, 2차 전투 때와는 달리 계획적으로 퇴각하고 있고, 손상을 입은 전투력과 병참 보급의 회복, 보충이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주시했다. 반면에 비록 승리하며 밀어 붙이고 있기는 해도 중공군의 사상자수와 보급상황에 대한 피해는 매우 심각했고 회복과 보충이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공군력과 무기 및 장비 열세 속에 보급로가 계속 길어지면 더욱 위험한 국면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북위 37도 선인 평택-원주-삼척 선에서 더 이상의 추격 남진을 멈추고 군대 휴식과 정비를 결정, 명령했다. 이 같은 펑더화이의 판단은 오랜 전투 경험을 기초로 형성된 감각과 능력이었고, 그 후 전투 진행 결과에 의해 정확한 판단이자 조치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김일성과 소련 군사고문 스티코프(Shtykov)는 퇴각하는 미군과 남한 국방군을 계속 추격·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펑더화이는 이들과 회의 중에 처음에는 인내심을 갖고 자신의 판단 근거를 설명했으나, 결국에는 후퇴하는 적을 계속 강력하게 추격·공격하여 바닷물 속으로 쓸어 버리자 주장하는 김일성과 언쟁 도중에 정색을 하고 “정 그럴 거면 네가 지휘해라. 난 안한다.”라고 대꾸했다 한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산전수전 모두 겪어낸 펑더화이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을 도발한 후 감당하지 못해 지원을 간청한 애송이가 또 다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요구를 하며 고집을 부리자 짜증이 났을 것이다. 


당시 평양 주재 소련대사와 소련 군사 고문이 스탈린에게 이 같은 상황을 보고 하면서 펑더화이의 태도를 비판했으나, 스탈린으로부터 받은 답장의 요지는 “조선전쟁의 모든 전략 결정은 백전노장인 펑더화이의 결정에 따르라” 였다.  


과연, 그 후의 전황 전개는 바로 펑더화이가 우려했던 대로 전개되었다. 바로 2월부터 리지웨이가 지휘하는 미군이 다시 반격하면서 4차 전투가 시작되었고, 중공군은 5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방어선도 38선 북쪽으로 100km 이상 밀렸다. 그 뒤에 4월부터 5월까지 진행된 5차 전투에서 중공군은 또 다시 대패하고 1만 70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원래 중공측 내부에는 연이은 세차례 전투 승리에 도취되어 “미군, 별거 아니다. 종이호랑이다”라는 오만한 정서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도 냉철하게 상황 파악과 결정을 한 펑더화이의 판단력이 돋보인다.  


5차 전투 후 1952년 2월 마오쩌동은 38선에서 장기적으로 대치한다는 지구전 전략을 제시했다. 이후 중공군이 반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백 리의 전선에 참호를 구축하면서 전쟁은 대치 국면에서 국지전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전 참전 중공군 사병들


정전협정


5차 전투 이후 중공군은 수세에 몰렸으나, 미군도 사상자 수가 10만 명을 넘어서면서 미국 국내에서 전쟁 중지를 요구하는 여론과 정치적 압력이 커졌다.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은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죽음이었다. 스탈린은 미국이 계속 동아시아 한반도의 전쟁터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상황이 소련의 유럽 전략 추진에 유리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므로, 한반도의 미중 전쟁 상황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었기에 정전협상에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스탈린이 죽은 후 약 4개월 후인 1953년 7월에 미군과 중공군 양측은 정전협상을 시작했고, 7월 27일에 정전협정서에 조인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중공은 자신들이 세계 최강 미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중공 측 사상자 수는 38만 명에 달했고 소모 군비도 20억 달러에 달했다.


정전협정 회의장에 들어서는 펑더화이와 중공측 대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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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6CGvSqZz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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