쏭메이링과 장쉐량
난징(南京)의 국민당 중앙은 사변이 발생한 당일, 1936년 12월 12일, 23시 30분에 중앙 상무 위원회와 중앙 정치회의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토벌과 협상을 병행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또 한편으로는 허잉친을 토벌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위여우런(于右任)을 섬서·간쑤(陕甘) 선무대사(宣撫大使)로 임명했다.
쏭메이링(宋美龄)은 시안사변이 발생한 당일 상하이에서 남편 장제스(蒋介石)의 체포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이전에 장쉐량의 고문이었고 당시에는 장제스의 정치 고문이었던 영국 국적의 호주 기자 출신 도널드(Donald William Henry, 1875~1946년)와 콩샹시(孔祥熙, 1880~1967년)와 대책을 의논하고 그날 밤에 도널드와 함께 시안으로 가기 위해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왔다.
국민당정부는 장쉐량(张学良)의 투항을 권고했으나 효과가 없자 중국 각계에 전보를 보내 토벌을 요구하고 허잉친을 토벌군 총사령관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류즈(劉峙)를 토벌군 ‘동로집단군(东路集团军)’ 총사령관으로, 구주통(顧祝同)을 ‘서로집단군(西路集团军)’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동서 양방향에서 동시에 시안으로 압력을 가했다. 이와 함께 공군은 시안 부근 도시들을 폭격하면서 점차 시안 쪽으로 압박해 왔다.
장쉐량은 충돌이 격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구금 중이던 장딩원을 석방하고 뤄양의 국민당군에게 보내서 잠시 군사행동을 중지해 달라는 뜻을 전하게 했다.
한편, 도널드의 노력으로, 12월 22일에 쏭메이링과 쏭즈원(宋子文) 등이 장쉐량의 허가를 받아 시안으로 출발했다. 쏭메이링은 시안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도널드에게 권총을 주면서 말했다.
“만일 반군이 나에게 어떠한 무례한 행동을 하면 이 총으로 즉각 나를 쏘아라.”
쏭메이링, 쏭즈원 남매와 도널드 일행이 시안공항에 도착하자 장쉐량과 양후청이 이들을 공항에서 영접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쏭메이링이 장쉐량에게 “장군, 이것이 내 물건인데 검사 안 해도 되겠죠?”라고 물었고, 장쉐량은 즉각 “부인, 어찌 감히, 어찌 감히!”라고 답했다.
이 장면은 이 두 사람이 젊은 시절에 상하이의 사교계에서 서로 교류하고 사귀었다는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장쉐량은 당시에 만주와 화북 지구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군벌 장쭤린(張作霖, 1875~1928년)의 아들이었고, 쏭메이링은 당시 중국 최고 거부인 쏭씨 집안 세 자매 중 셋째로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였다.
시안사변, 평화적 해결
장쉐량은 양후청(杨虎城)과 함께 쏭메이링, 쏭즈원 남매와 회담을 마친 후에 쏭메이링과 도널드를 장제스가 감금된 방으로 데리고 가서 만나게 해주었다. 그다음 날(1936년 12월 23일), 장쉐량의 공관인 서루(西樓) 2층에서 담판 회의를 했다. 쏭즈원이 국민당정부 대표로 참석했고, 시안 측 대표는 장쉐량, 양후청, 그리고 중공이 파견한 저우언라이였다. 시안 측은 6개 항의 주장을 제시했고 다음 날(12월 24일)에 장제스가 다음과 같은 6항 협의에 서명하고 ‘내전 중지와 연합 항일’ 주장을 수용했다.
⦁내전 중지, 국민당군 통관(潼關) 밖으로 철수
⦁난징 정부 개각, 친일파 축출, 항일 인사 추가 영입
⦁정치범 석방, 민주 권리 보장
⦁공산당 토벌 중지, 홍군과 연합 항일
⦁각 당파 각계 각 군이 참여하는 구국 회의 개최
⦁항일을 지지하는 국가와 연합 항일
12월 25일 오후에 저우언라이가 다시 장쉐량张学良에게 중공의 장제스 석방 조건을 설득하려 했으나 장쉐량은 이미 장제스와 비행기를 타고 뤄양洛阳으로 떠난 뒤였다. 시안을 떠나기 전에 장쉐량은 동북군을 양후청의 지휘에 맡긴다는 친필 명령을 남겼고, 그다음 날(1936년 12월 26일), 장제스와 함께 난징에 도착했다. 이로써 시안사변이 평화적으로 종결되었다.
시안사변 이후 동북군과 서북군은 와해되었다. 장제스와 같이 난징으로 간 장쉐량은 난징공항에 내리자마자 체포되었다. 그 후 장제스에게 연금된 상태로 대륙에서 타이완으로 끌려갔고, 90세 생일을 맞은 1990년에야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蒋经国) 총통에 의해 석방되어 1995년에 하와이로 가서 살다가 2001년 10월 14일, 101세로 생을 마쳤다.
양후청은 시안사변 해결 후 국외로 도피하여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을 전전했고, 다시 홍콩을 통해 대륙에 들어오다가 국민당 특무들에게 체포되어 구금 생활을 하던 중 1949년 9월 17일, 장제스와 국민당 잔여 세력이 타이완으로 퇴각할 때에 충칭(重慶)에서 살해되었다. 당시 56세였다.
시안사변 발생과 평화적 해결은 10여 년간 지속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을 끝내고 제2차 국공합작과 일치 항일 단계에 진입하면서 항일 민족통일전선 형성을 촉진했다. 이는 중공에게 합법적으로 생존하고 한숨 돌리면서 전력을 보강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준 것이었다.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한 후 마오쩌동은 중공중앙정치국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안사변은 우리를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이 사변의 영도자인 장쉐량과 양후청 두 장군에게 특별한 존중과 감격의 정을 품고 있다."
반면에 국민당의 시안사변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9·18 만주사변 후 장쉐량이 근거지인 만주에서 일본에 저항하지 않아서 전국 인민의 비판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장제스의 ‘선(先)공비토벌, 후(后)항일’ 방침을 정치 선동 수단으로 이용한 중공의 대(對)동북군 공작에 말려들어서 저지른 우발적 행동이었다. 더구나 국민당정부가 준비해 온 전면 항일 행동 개시 이전에 시안사변이 발발하여 국민당의 항일 전략을 중단시켰다. 또 한편으로는 중공에게 한숨 돌리고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항일전쟁 승리 후 중공이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역량을 기를 수 있게 해주었다."
한편, 시안사변 이후 조성된 국공합작 통일전선 국면은,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재중 조선 혁명가와 독립운동 단체의 활동 반경을 대폭 넓혀주었다.
우리 항일독립운동의 활동범위 확대
당시 중국에 있던 조선인 독립운동 단체 중에는 1919년 의열단 결성 이후 활동을 전개하면서 무장투쟁 병력을 보유한 민족혁명당(주석: 김원봉)의 활동이 가장 강력했고, 이 외에 보수 민족주의 진영에 한국국민당(김구), 한국독립당(조소앙), 조선혁명당(지청천) 3개 당이 있었다. 이들 재중 조선인 혁명가와 독립운동 단체들은 원래 국민당정부의 대일 타협 노선과 반공 정책 등으로 인하여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었으나 제2차 국공합작으로 중국 내 항일 민족통일전선이 구축되자 그러한 제약들이 폐지되었고 이들의 활동 반경도 대폭 확대되었다.
https://youtu.be/Dm3uBGuOT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