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성 Feb 09. 2024

토지 공유제 회복과 쇠퇴-균전제

중국부동산 공부(10)

북위의 균전제 실시, 토지공유제의 회복

북위(北魏)의 균전제(均田制) 실시는 토지 공유제(公有制)의 회복을 의미한다.

균전제란 국가가 조세 부담을 지울 수 있는 연령에 달한 농민에게 농지를 분배·지급하고, 조세를 징수하, 농민이 노동력을 상실하여 조세 부담 면제를 받는 연령에 이르거나 사망하면 농지를 환수 받는 토지제도이다. 따라서 균전제는 토지 공유제(公有制)를 전제로 한다.


춘추전국 시기 말기부터 시작된 국유토지의 사유화 추세에 따라 토지매매와 토지겸병이 성행하고, 동시에 농민에 대한 지대 수탈이 극심해지면서, 착취 압박을 피해 도망해 떠도는 유민(流民)이 증가했다. 이에 따라 중원 한족 왕조사회 혼란이 가중되고, 재정 기반 약해지고 쇠락해갔다.

탁발 선비족의 이동 경로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민족으로 중국 북방을 점령하고 왕조를 세운 선비족의 탁발(拓跋)씨 왕조인 북위(北魏)가 한족 토호의 토지를 몰수하고, 곤궁한 소농(小农)들의 참상에 대한 해결책으로 자신들의 토지분배 사상인 “가족 수에 따른 농지분배(计口授田)”, “선빈후부(先贫后富)” 사상을 (이전에 중원에서 실시되었던) 정전제(井田制)와 점전제(占田制) 등의 국유제 토지제도에 접목한 균전제(均田制)를 시행했다.

북위의 효문제(孝文帝)가 태화(太和) 9년(485년)에 균전령(均田令)을 공포하고, 국가가 지급(授) 및 환수(还)하는 방식으로 농지를 평균 분배했다.

이와 같이 균전제(均田制)의 핵심 사상은 토지국유제를 기초로 토지와 노동력의 합리적 배치를 통해 생산을 최대화 한다는 것이다.

북위가 시작한 균전제는 북조, 북제 및 그 후의 수·당까지 300여 년간 실시되었다. 균전제가 시행되면서, 토지제도의 중점이 국가소유권과 개인소유권 간의 관계 조절에서 국가소유권과 농민의 토지사용권 간의 관계 조절로 이동했다.


‘균전(均田)’ 사상이 중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이후 발생한 역사상의 수많은 농민 봉기가 모두 ‘균전’을 구호로 내걸었으며, 근대에 홍수전(洪秀全)의 천조전무제(天朝田亩制)와 경자유전(耕者有其田), 그리고 쑨원(孙文)의 평균지권(平均地权) 사상의 기초도 ‘균전’ 사상이었다. 북위 시기 균전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15세 이상 남자에게 노전(露田: 일반 농지) 40무, 뽕밭(桑田) 20무를 지급하고, 부녀자에게 노전 20무를 지급한다. 휴경(休耕)용으로 노전을 배로 지급한다. 노전은 70세에 관에 반환하고, 뽕밭은 사전(私田)으로 할 수 있으며 반환할 필요가 없다.

② 노전과 뽕밭 모두 매매할 수 없다. 단, 뽕밭 면적이 20무를 초과하면 그 초과한 부분을 매매할 수 있다.

③ 지주는 그가 보유 및 사용하고 있는 노비와 경작용 소의 정황에 따라 별도의 토지를 획득할 수 있다. 노비에게 지급하는 농지 기준은 농민과 같고, 경작 소 한 마리당 지급 농지는 30무이며, 경작 소는 4마리로 제한한다.

④ 지방관(地方官)은 관직의 대소에 따라 공전(公田)을 지급하며, 자사(刺史)는 15경, 현령(县令)은 6경이다.  

   

과세제도의 경우, 균전제 실시 이전에는 주로 ‘9품혼통(九品混通)’ 방법을 채택해, 농민 한 호를 여러 농민이 종속되어 있는 지주 한 호와 동등하게 보고, 조세 부담 단위로 삼았다. 이는 농민에게 매우 불리했다. 균전제 실시 이후에는 성인 남녀 1인을 과세 징수 단위로 했으므로 농민의 세수 부담이 대폭 줄었다.     



참고: 북위 왕조와 효문제

북위(北魏) 효문제

효문제는 북위의 여섯 번째 황제다. 467년 태어나 499년 서른셋의 나이로 죽었다. 헌문제 탁발 홍(弘)의 장자로 이름은 탁발 굉(宏)이다. 나중에 한식 성 원(元)씨로 바꿔 원굉(元宏)이라고도 한다.

* 탁발(拓跋) 선비는 대륙을 통치하면서 성을 원(元)으로 바꿨다.


선비족이 주도한 오호(五胡) 이전에도 북방 민족과 한족의 접촉은 있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에 들어선 후에는 그 규모와 내용 면에서 급진전되었다. 즉, 소극적인 접촉 단계를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호(胡)와 한(漢)의 융합이 진행되었고, 그 변화의 폭도 넓고 깊었고, 진행 속도도 빨랐다. 또한 자연스럽고 점진적으로 진행된 변화가 아니고 국가 정책과 제도로 공포하고 강제력을 동원하여 시행했다.


이 같은 호(胡) 한(漢) 융합의 추진력과 변화 속도는 효문제 시기에 정점을 이뤘다. 효문제는 조상으로 부터 물려 받은 북방 선비족의 성(性)을 한족의 성으로 바꾸고, 궁정에서 문자와 말을 한족 언어로 사용하도록 강제했고, 수도를 평성에서 한족 왕족의 수도였던 고도 낙양(洛陽·뤄양)으로 천도했다.


이하는 박한제(서울대 동양사학과 명예교수)의 설명이다.


“탁발선비 천년 역사는 정말 극적입니다. 기승전결 구조를 절묘하게 이어간 장편서사이고, 한 편의 뛰어난 문학작품입니다. 선비족 탁발부가 알선동을 떠나 초원으로 들어가고 다시 남천하여 천녀와 결합하면서 흉노고지에 다다른 것을 기(起)라 한다면, 대국과 북위를 거쳐 태무제가 화북을 통일하고 효문제가 호한융합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여 중원의 제국으로 솟아오른 것이 승(承)에 해당합니다. 북위의 황실은 자기 소명을 다하고 무대 뒤로 물러나고 다시 북제와 북주, 수나라로 전환하여 새로운 추동력을 끌어낸 것을 전(轉)이라 볼 수 있고, 수를 뒤엎은 당나라가 ‘장안의 봄’을 꽃피우며 대당 제국으로 세계사에 새로운 장을 연 것이 바로 결(結)이라 할 수 있지요. 이 가운데 효문제는 상승 기류의 정점을 찍은 장본인입니다.”

효문제의 묘 장릉(長陵), 낙양 망산(邙山)

효문제의 묘 장릉(長陵)은 뤄양시 북쪽 교외 멍진현(孟津縣) 망산(邙山)에 있다. 망산에는 후한의 황제들과 당송의 유명 인사들의 무덤이 많은 곳으로 북망산이라고도 일컬어 지는 곳인 데, 효문제 이후의 북위 황제들의 묘가 모두 이 곳에 있다. 이러한 연고로 '북망산'이 사후 묘지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다.


효문제가 실행한 가장 강력한 호한융합 정책은 평성에서 낙양으로의 천도이다. 그러나 천도  늘 강한 반대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낙양의 더운 여름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는 북방 출신의 군신은 물론이요, 일부 한 관료중에"천도에는 열 가지 손실이 따른다"면서 반대했다.


효문제는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천도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종의 책략을 사용했다. 당시 장강(長江)과 그 이남 지역에는 동진이 멸망하고 유송(劉宋)을 거쳐 남제(南齊)가 북위와 대치하고 있었다.

효문제는 남제를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일으켰다.

조정의 중신들은 이에 대해서도 아직은 군대를 일으킬 때가 아니라고 반대했으나 효문제는 493년 친히 삼십만 대군을 이끌고 남쪽의 낙양으로 다.


효문제가 낙양에 가는 도중에 가을비가 한 달 내내 이어져 내렸다. 길은 진창이 되고 행군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효문제는 직접 선두에 나서서 진군을 독려했다.

대신들은 남제 정벌을 거두라고 간했지만 효문제는 중도에 회군하면 후대의 웃음거리가 된다는 이유로 진군을 고집했다.


대신들이 계속해서 반대의견을 간하자 효문제는 비로소 낙양 천도에 찬성하면 일단 철군하여 남제 정벌을 미루겠다고 했다.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효문제는 더 강하게 밀어붙였고, 당장의 남방 원정을 더 꺼린 대신들은 마지못해 낙양 천도에 찬성했다.

그렇게 주력 부대를 이끌고 낙양에 주저앉음으로써 천도를 강요하고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천도 직후 탁발선비의 습속에 대해서도 한화(漢化)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선비족이라도 호복이 아니라 한족 복장을 착용하게 했고, 평성에 분묘를 쓰지 못하게 하고 낙양의 망산에 분묘를 쓰도록 했다.

조정에서는 선비어가 아닌 한어만 사용하게 했다.

문화 방면에서도 천도에 버금가는 급진적 개혁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북위 효문제 출행도


출처 : 윤태옥, http://weekly.chosun.com





수·당 시기의 토지제도와 균전제 사상의 소멸


수의 토지제도

수 문제

수조(隋朝) 정부는 균전, 둔전, 직전(职田), 영업전(永业田) 등의 형식을 통해 대량의 토지를 국가와 관료의 수중에 집중시켰다. 수의 균전제는 장정 수에 따라 농지를 분배하는 제도로, 그 기본내용은 농민이 받는 토지는 노전과 영업전 두 종류로 구분한다.

성인 남자 1인당 노전 80무를 주고, 부녀자는 1인당 40무를 주었다. 노비에 대한 농지 지급 기준도 일반 성인과 같았으나, 인원수를 제한했다. 건강한 소(壮牛) 한 마리당 농지 60무를 주고, 한 집에 4마리로 제한했다.

또한 장정 1인당 영업전 20무를 지급했고, 뽕밭과 삼밭(麻田) 중 선택하게 했다. 뽕밭과 삼밭은 환수할 필요가 없었으나, 노전은 규정에 의해 환수했다. 그 외에 채소를 심는 텃밭(园田宅)도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농민에게는 매 3인당 1무를 지급했고, 노비는 5인당 1무를 지급했다.


균전제를 실시하기는 했지만, 관료지주에게 농민보다 훨씬 많은 농지를 지급했으며, 또한 관직이 높을수록 지급 농지도 더욱 많았다. 총괄하면, 수의 균전제는 모든 토지를 분배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으며, 지주계급이 점유한 토지의 점유권을 보장해 주는 기초 위에서 진행되었다.     


당 전기의 토지제도와 균전제 사상의 변화

당태종 이세민

당조(唐朝) 전기(前期)의 가장 중요한 토지제도도 균전제였다. 그 기본 내용은 주로 세 가지 방면을 포함했다. 첫째, 18세 이상의 중남(中男)과 성년 남자(丁男), 노년 남자(老男), 불구자(废疾), 잡호(杂户), 도사(道士), 여승(尼姑)에게 주는 농토의 수량을 규정했다.

둘째, 귀족 관료에게 주는 농토에 대해 규정했다.

셋째, 토지매매에 대한 규정은 이전에 비해 느슨했다. 구분전(口分田)은 법률로 매매를 금지했으나, 토지자원이 부족한 지구에서 풍부한 지구로 이전하는 자는 (토지를) 팔 수 있었다. 영업전도 상황에 따라서는 매매가 가능했다.


당(唐)대의 균전제에 매우 큰 변화가 발생했다.

첫째, 농토 분배의 대상이 남녀 승려, 남녀 도사, 그리고 공상업자로까지 확대되었다.

둘째, 관리(官吏)에게 지급하는 농토에 관한 규정이 이전의 각 왕조에 비해 더욱 완벽하게 정비되었다.

셋째, 토지매매에 대한 규정이 완화되었다. 마지막으로, 관병(官兵)을 우대했다.

이러한 변화는 대부분 수대에 시작되어 당대에 완성되었다.

특히 관리에게 농토를 지급하는 방법의 정비와 토지매매 규제의 완화는 대토지사유제가 갈수록 우세를 점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납세제도

당조 초기 납세제도는 조용조(租庸调)제도를 시행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장정에게 징세(徵税)한다.

• 장정 1인당 매년 납부하는 세는 곡식(粟) 2석(石)이고, 지방의 형편과 생산량에 따라 조정한다. 그 외에 매 장정은 매년 20일간 부역(徭役)을 제공해야 하며, 만일 부역을 피하려면, 부역일수 1일당 비단 3척(尺) 또는 포(布) 3척 7촌(寸) 5분(分)을 납부해야 한다.

• 관리와 귀족은 부역을 면제한다.

• 수해, 한해, 병충해, 냉해 등의 손실을 입을 경우에는, 손실의 4할 이상의 세금과 7할 이상에 해당하는 노역 부과를 면제한다.     


조용조제도는 중국 역사상 중요한 부역제도(赋役制度) 중의 하나이며, 부역량 측면에서 비교하면 전대(前代)보다 가벼워져서, 농업생산력을 개선, 회복 및 발전시키는 데 유리했다. 다른 한편으로 조용조제도는 상품 교환을 제한해서 사회경제 발전에는 일정 정도 소극적 영향을 미쳤다.     



균전제의 붕괴

균전제는 당 중엽 이후에 붕괴되었다. 그 원인은 세 가지 측면에서 귀납할 수 있다.


첫째, 정치의 부패이다. 당 초기에도 균전제는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기는 했으나, 군주가 비교적 영명(英明)했으므로 그래도 순리적으로 실시할 수 있었다. 중종(中宗) 이후에 정치가 부패하고, 인구수와 농토면적 수량이 불명확해지면서 균전제는 전반적으로 문란해졌다.


둘째, 주도면밀하지 못한 입법(立法)으로 인해 토지매매와 토지겸병이 갈수록 증가했다. 당 초기의 입법이 주도면밀하지 못했고, 특히 토지매매 문제에 대해 입법이 엄격하지 못했으므로, 불법 이주와 토지매매가 나날이 증가하고, 부호(富豪)들도 기회를 타고 대량의 토지를 겸병했다.


셋째, 인구 증가와 국유토지의 고갈로 균전제 유지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물적 조건을 상실했다. 안사의 난(安史之乱) 이후 균전제도는 전면 철폐되었고, 청조 말년까지 각 왕조는 토지사유제도를 시행했다.


출처: 박인성, 조성찬, 2018. '중국의 토지정책과 북한', 한울, 35-40쪽


#북위 #균전제 #정전제 #점전제 #토지사상 #토지사유화 #토지겸병



작가의 이전글 사회주의 개조-토지개혁 투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