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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Feb 11. 2024

한국전쟁 발발과 중공 내부의 출병토론

중국현대사(28)-한국전쟁(1)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남과 북의 군대 외에, 미국이 주도한 국제연합(UN)군과 중공군이 제1선에서 무력으로 맞대결한 전쟁이다.

또한 최근에 공개된 자료와 밝혀진 정황들에 의하면, 이 전쟁은 북측의 김일성 정권이 상당 기간 준비 작업을 하고 기획·발동했다는 점이 명확하다.

작가 한강

그러나 최근(2018년)에 소설가 한강이 ≪뉴욕타임스(The NewYork Times)≫에 기고한 칼럼에서 “대리전”이라고 표현하여 논란이 되었을 정도로 한국전쟁은 전쟁의 성격과 세부적인 전투 상황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남한과 북한, 중국, 미국, 연합국(UN) 소속 참전국과 소련, 일본 그리고 기타 제삼국 등 각자의 입장과 관점에 따라 차이가 크다. 심지어 상반되는 민감한 쟁점들도 많다.

한강 작가의 뉴욕타임지 기고문 제목
평양시 군중대회에서의 김일성과 배후의 소련군 장군들

김일성은 일제가 한반도에서 물러간 후에 소련군의 비호 하에 북위 38도선 이북 한반도 북부 지구로 들어와서 북반부의 통치권력을 장악한 후,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마오쩌뚱에게 허락과 지원을 간청하며 꾸준히 전쟁 준비를 해왔다.

이는 최근에 구소련과 중국의 관련 자료가 공개되면서 더욱 명확하게 밝혀졌다. 특히, 소련 붕괴 후 김영삼 대통령이 1994년 6월 2일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은 6·25전쟁 관련 문건 216점(548쪽 분량)이 명확하고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남침 지원 요청을 위해 방중한 김일성과 박헌영(빨간색 원), 1949년 모스크바

김일성은 1949년 3월 3일부터 20일까지 북조선 내각 부수상 박헌영 등 6명의 각료와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3월 7일에 스탈린을 찾아가 무기와 장비 지원 등 군사원조를 요청하면서 남침을 허가해 줄 것을 간청했다.

김영삼 대통령 러시아 방문을 계기로 1994년에 공개된 ‘구소련 비밀외교문서’ 중 1949년 3월 7일 스탈린·김일성 회담 기록에 의하면, 당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황으로 볼 때 지금 우리가 전체 한반도를 군사적 수단으로 해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우리 군대는 남조선 군대보다 강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남조선 내에서 강력히 일고 있는 게릴라 운동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남조선의 인민 대중들은 친미 정권을 증오하고 우리를 도울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때 스탈린은 김일성의 요청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거부했다.


첫째, 북한 인민군이 남조선 군대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지 못하다.

둘째, 미군이 아직 남조선에 주둔하고 있다.

셋째, 미·소 간의 38선 협정이 아직 유효하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이유가 되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 이유는 당시까지 소련이 핵폭탄을 보유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단, 스탈린은 북한과 경제·문화 협정 등을 체결했다. 3월 17일에 ‘조·소 군사비밀협정’을 체결하고, 이 협정에 의해 북한에 6개 보병사단, 3개 기계화부대, 8개의 국경 수비대대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를 제공하고, 1949년 5월 20일까지 120명의 특별 군사고문단을 파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소련군 장성 사이의 김일성

북한이 소련과 ‘군사비밀협정’을 체결한 다음 날인 3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소련 당국의 주재로 중국과 북한이 ‘조·중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측은 여하한 성격의 침략에 대해서도 공동방위를 한다. 어떠한 제국주의 세력이든 조선 또는 중국의 일방을 공격하는 경우, 양국은 그 세력에 대한 공동 전쟁에 필요한 공동 행동을 취한다."


협정 체결 후 김일성 정권은 중공 정권으로부터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조선족 장병 약 4만 4000명을 양도받았다.

이후 김일성은 인민군 10개 사단 병력 13만 명을 전방인 38선에 배치했고, 후방에는 10만 명의 예비군을 조직, 배치했다.

스탈린과 함께 앉아서 좋아하고 있는 김일성

한편, 1949년 8월, 소련의 원자핵 폭탄 실험 성공에 따라 스탈린은 세계 전략을 전반적으로 재조정하게 된다.

이 같은 분위기를 파악한 김일성은 1950년 3월에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간청하고 결국 허락을 받아낸다.

소련공산당 중앙위 국제국이 작성한 「1950.3.30~ 4.25, 김일성의 소련 방문건」이라는 문서에 의하면 그 기간 중인 4월 10일 회담에서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스탈린이 김일성의 간청을 수락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민군대 군사력이 남조선의 군사력보다 절대적으로 우세하게 육성되었다. 반면에 남조선 군대는 무기, 장비가 미약하고 전투 병력은 전투 경험이 없다.


둘째, 국제정세가 유리하게 변했다. 1948년 9월부터 미군이 남조선에서 철군을 시작했고, 1949년 6월 말에 군사고문단 495명을 제외하고 남조선에서 철수했다.

또한 1950년 1월 12일에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한국과 타이완을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라인(Acheson line)을 발표했다.


셋째, 1949년 10월 1일, 중국 대륙에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어서 중국이 북조선의 남침 전쟁을 도와 줄 수 있게 됐다.

바실리에프 중장

기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제 소련도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것이었다.


남침을 허가한 스탈린은 바실리에프 중장에게 전쟁 작전계획을 작성토록 지시했다. 바실리에프가 작성한 김일성의 전쟁 계획은 3단계로 짜였다.


제1단계는 38선을 돌파해 2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수원-원주-삼척을 잇는 선까지 5일 안에 진격한다.

제2단계는 그로부터 14일 안에 군산-전주-대구-포항을 잇는 선까지 진격한다.

제3단계는 그 후 10여 일 안에 목포-여수-사천-마산-부산을 잇는 남해안 지구를 점령하고 전쟁을 종결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조선인민군 군대가 먼저 남한 군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개전 초기에는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하여 부산 부근 낙동강 방어선까지 쳐 내려왔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당시 팔로군과 동북항일연군, 그리고 인민해방군 소속으로 수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조선족 부대 중심으로 구성된 북한군은 3일 만에 남한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그러나 개전 3일 후인 6월 27일에 미국이 출병해 제7함대를 타이완해협에 배치했고, 9월 15일에는 미군 1만 8000명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9월 27일에 서울을 탈환했다.

이후 미군과 남한 국방군이 북진을 계속하면서 38선을 넘고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 변까지 밀어붙였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친필편지, 단동 항미원조기념관


중공의 조선 출병 토론

다급해진 김일성은 10월 1일, 즉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주년 기념 국경절에 당시 북한 부수상이자 외교부장이던 박헌영을 베이징으로 파견하여 마오쩌과 저우언라이(周恩来)에게 친필 편지를 전달하고 중공군 파병을 간청했다.

단동시, 항미원조전쟁 기념관

소련의 스탈린도 베이징에 건국 1주년 축전을 보내면서 별도로 마오쩌에게 김일성 지원을 위한 조선 출병을 요청했다.

다음 날(1950.10.2), 마오쩌은 정치국 상무위원들을 긴급 소집하고 조선 출병 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한 정치국 상무위원 대부분이 출병에 반대했다.


원래 마오는 출병 지휘자로 쑤위(粟裕)를 고려했으나, 당시에 쑤위는 병으로 칭다오(青島)에서 요양 중이었다.

정치국 내에는 린뱌오(林彪)에게 지휘권을 맡기자는 의견이 다수였으나 정작 린뱌오 본인은 조선 출병에 가장 강하게 반대했다.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린뱌오가 한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린뱌오(林彪)

"국내 전쟁이 이제 막 끝난 상태이고 각 방면에서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만일 출병하면 필히 전쟁의 화상을 입게 될 것이고 그 결과의 엄중함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국민당과 싸울 때는 그래도 할 만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을 때려눕힐 수 있을 지는 장담할 수 없다. 만일 미군이 몇 개의 원자탄을 던지면 우리는 정말 힘들 것이다."


마오쩌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바로 이같이 자신의 주장에 대해 김 빼는 말이다. 마오가 그 자리에서 린뱌오에게 대꾸했다.


“그들은 그들의 원자탄을 갖고 있고 나는 나의 수류탄을 갖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원자탄으로 때리고 나는 나의 수류탄으로 때린다. 나는 나의 수류탄이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원자탄을 이길 수 있다고 믿는다.”


마오쩌 특유의 오기가 가득 담긴 말이었다. 출병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며칠간 밤잠을 설친 예민한 상태에서 린뱌오에 대한 실망감이 표출된 말이었겠지만 이러한 면이 마오의 성격을 대표하는 특징 중 하나였다.


린뱌오가 다시 말했다.


“나는 출병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건 출병하지 않는 것이나, 만일 꼭 가야 한다면, 가기는 가되 싸우지 않는 게(出而不战) 좋습니다. 조선 북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형세를 살펴보다가 가능하다면 싸우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린뱌오의 이 같은 말은 임진왜란(1592~1598년, 7년전쟁) 기간 중 화의 교섭이 깨진 후 다시 발발한 정유재란(1597.6~1598.12) 당시에 ‘항외원조(抗倭援朝)’ 명분으로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총사령관 형개(邢玠)가 “우리는 양지에선 싸우지만 음지에선 화친하기를(陽战阴和) 원한다”라고 한 말을 연상시킨다.


이때 저우언라이가 린뱌오를 비판하면서 말했다.


“현재의 문제는 우리가 싸울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미국이 우리를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몰아대고 있다. 더구나 김일성이 거듭 우리에게 출병을 간청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죽는 걸 보고만 있겠는가?”


마오가 린뱌오를 다시 설득하려고 했으나 린뱌오는 자신이 “매일 밤잠을 못 자고 신체가 쇠약해졌으며 늘 병을 달고 살고 있다”라고 호소했다.

결국 마오는 린뱌오를 포기하고, 당시 섬서성(陝西省) 시안에서 서북국 제1서기로 일하고 있던 펑더화이(彭德怀)를 대안으로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조선 출병은 매우 화급한 문제이다. 더 이상 의논만 하고 결정을 미룰 수는 없다. 린뱌오가 병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하니 나는 펑더화이가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마오쩌뚱과 펑더화이(彭德怀), 옌안(延安) 시질

그러자 주더가 마오의 말을 받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역시 펑(彭)이 믿을 만합니다.”


펑더화이와 린뱌오 두 사람 모두를 잘 알고 있는 주더의 이 말이 매우 의미심장했다.


기타 상무위원들도 모두 펑더화이에게 조선 출병 지원군 총사령관을 맡기자는 데에 동의했다.


회의가 끝날 무렵에 마오쩌은 저우언라이에게 이날의 회의 상황을 스탈린에게 전보로 알리라고 지시하고, 이틀 후인 10월 4일에 정치국 확대회의 개최 준비를 하고 펑더화이도 참석시키라고 지시했다.


* 박인성, 2023. 박인성의 중국현대사, 한울, 14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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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pgfg9F2n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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