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자라나기 시작한 아이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한 명만 빼고.
수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살아간다.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착한 아이, 이따금씩 튀어나와 존재감을 발휘하는 반항적인 아이, 감자칩을 먹을 때 가장 행복한 푸근한 아이, 인형의 머리를 빗겨주는 걸 좋아하는 소녀스러운 아이, 여기저기 눈치보느라 24시간을 몽땅 쓰고 마는 아이… 그리고, 나를 증오하는 아이.
아이들은 웅크린 채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다가, 자기가 나설 차례가 오면 탱탱볼처럼 잽싸게 튀어나간다. 발 디딜 틈 없이 바글바글하고, 때론 손으로 귀를 틀어막을 만큼 왁자지껄하다. 모든 아이들과 사이좋게 지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기에 내 마음의 그릇은 한없이 좁고, 얕으니까.
언제나처럼 세월은 흐른다. 여전히 말 잘 듣는 착한 어른, 반항하는 법과 함께 나로 살아가는 법을 잊은 어른, 이제는 가방에 인형 대신 키링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어른, 감자칩 대신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털어마시며 인생의 고달픔을 달래는 어른, 눈치보는 게 습관이 되어 여전히 온종일 바쁜 어른.
나와 동고동락했던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어른이 되었다. 단, 한 명만 빼고.
스스로를 증오하는 아이만은 어른이 되지 못했다. 자신을 향한 미움에 갉아먹혀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땐 투명한 막이 아이와 상대방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이는 법을 잊었다. 아니, 자신을 잃었다. 자유로이 감정을 표현하고, 해맑은 어린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유리벽은 나날이 두꺼워졌다. 사방에서 아이를 옥죄어온다. 아이는 자신의 목을, 심장을, 살갗을 죄어오는 유리벽에 어지럽다. 숨이 막힌다. 혼란스럽다. 아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감옥은 거대한 쓰나미처럼 아이를 덮쳐온다.
‘숨 막혀. 도망치고 싶어. 그런데 방법이 없어. 제발!‘
아이의 위태로운 절규를 들은 것일까. 그 순간, 꼼짝 않을 것 같던 유리벽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쨍그랑. 아이의 발 옆에 쇠망치가 따가운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아이는 주저 없이 쇠망치를 집어든다.양손으로 망치를 힘껏 잡고 덮쳐오는 유리벽을 내리치려던 그 순간, 멈칫. 주춤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를 옭아맨 건 너일까, 나일까?’
스스로 쌓아올린 유리감옥에 갇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는다.
그러다 결심한 듯, 망치를 들고 한 발짝 성큼 내딛는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4월, 맑고 쌀쌀한 날이었다. 괘종시계가 13시를 알렸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그 순간이, 와버렸다.
*인용
첫 문장: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한 명만 빼고"<피터 팬>
끝문장: "4월, 맑고 쌀쌀한 날이었다. 괘종시계가 13시를 알렸다."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