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겹이 쌓여온 서운함

by nemo


있잖아, 내가 부모가 되면서 절대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말이 뭔지 알아?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말이야. 내가 청소년 상담 공부도 했잖아. 아이한테 죄책감 주는 저 말만큼은 죽어도 하지 말아야지, 맹세하고 또 맹세했거든.

근데 오늘 그 다짐이 와르르 무너졌어. 하루 종일 마음이 너무 안 좋아.

우리 아들이 이제 곧 고3이잖아. 닭가슴살 먹고 몸 관리하겠다고 해서 사줬는데, 냉장고를 보니 육즙이 흘러나와서 금방 상하겠더라고. 그래서 상할까 봐 새벽같이 일어나서 그걸 다 구워놨어. 잘했지? 나는 내가 참 잘한 줄 알았어.

근데 사무실에서 일하는데 전화가 왔어. 대뜸 짜증 섞인 목소리인 거야.

"엄마, 닭가슴살을 왜 다 구웠어?"

부드럽게 먹고 싶은데, 미리 구워 놓으면 딱딱해져서 맛이 없대. 식감이 별로라고 따지듯이 묻는데... 내가 할 말이 없더라.

"너 지금 엄마한테 화내는 거야?" 하고 물으니 "어, 화났어." 그러네.

순간, 멍해졌어.

물론 내가 미리 물어보지 않은 건 미안해. 그래도 "엄마, 이거 딱딱해서 못 먹겠어. 새로 사줘." 했으면, "어, 알겠어. 미안해." 하고 담백하게 끝냈을 거야.

근데 아이가 화난 티를 팍팍 내면서 나를 몰아세우니까,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뭐가 욱하고 올라오더라.

사실, 고작 닭가슴살 한 덩이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닐 거야. 알지?

그동안 ‘고3이니까’, ‘지금 예민할 때니까’ 하면서 꾹꾹 삼키고 넘겼던 그 수많은 짜증과 한숨들이... 오늘은 목구멍에서 턱 걸려 넘어가지가 않더라고. 얇은 종이 같던 서운함들이 쌓이고 쌓여서, 오늘 닭가슴살 핑계로 와르르 무너진 것 같아.

내 30대가 통째로 스쳐 지나가는 거야.

밤새 간호하고, 업어 키우고, 그 칭얼거림 다 받아주며 놀아주던 내 시간들. 자식 입장에선 기억도 안 나는 당연한 일들이겠지만, 나는 내 젊음을 다 바쳐서 키웠잖아.

새벽에 졸린 눈 비비며 고기 굽던 내 마음은, 아들한테는 그저 '식감을 망친 실수'였나 봐. 아들한테 혼꾸녕이 나고 나니 서러움이 밀려오더라.

나도 알아. 아이도 힘든 시기라는 거. 근데 오늘은 상담사고 뭐고 다 내려놓고 싶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오늘은 내가 했던 그 다짐, 그냥 번복할래.

나 오늘 진짜 너무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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