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 의식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특징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하여

by nemo

물론 피해의식이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살아오며 받은 상처와 경험을 통해 약간의 피해의식을 안고 살아간다. 문제는 그것이 삶과 관계를 지배할 만큼 커질 때다.


피해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피해’에 대해 유난히 민감하다.

그래서 늘 방어적이고,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이 손해를 보고 있는지, 상처를 입고 있는지를 먼저 계산한다. 그 계산에는 많은 에너지가 쓰인다. 그러다 보니 정서적인 피해나 금전적인 피해에 대해 실제 상황보다 더 과장되거나 비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때가 많다.


이들은 상대의 말투나 행동을

‘나를 무시해서 한 행동’,

‘나를 깎아내리기 위한 태도’로 해석한다.

상대방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마음속에서는 ‘나는 또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결론에 먼저 도착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다.

같은 상황을 겪더라도, 상대의 태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차원의 정서를 경험하게 된다.

예를 들어,

“상대방은 그런 의도가 없었지만, 나는 상처를 받았다”라는 말은 겉보기에는 피해의식과 비슷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상대를 가해자로 규정하기보다, 자기 안에서 일어난 감정을 인식하고 머무르는 태도에 가깝다.

이는 ‘저 사람은 나를 무시했다’라는 단정이 아니라,

‘그 말이 나에게는 아프게 느껴졌다’라는 감정의 인식이다.


상대의 의도를 확정 짓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피해의식과는 분명히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둘의 차이를 잘 모른다.

상처받았다는 말과 피해를 입었다고 믿는 말은 전혀 다른데도, 우리는 종종 그것을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전자는 자신의 감정을 책임지는 태도이고, 후자는 해석의 단계에서 이미 상대를 공격자로 고정해 버린다.


피해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형성된 판단을 ‘사실’처럼 믿는다.

그래서 상대방의 행동을 자신만의 결론으로 예측하고, 그 예측 안에서 스스로 불편해진다.

‘저 사람은 분명 나를 이렇게 생각할 거야’,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저 사람은 나를 오해하고 있어.’

이렇게 오해 위에 또 다른 오해를 쌓아 올린 채, 혼자 마음의 거리를 벌려 놓는다.

상대방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상대방은 무언가를 느낀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함께 있으면 어딘가 불편하고, 조심스럽고, 긴장하게 된다. 겉으로는 잘 지내는 것 같지만, 관계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다.


특히 경제적·정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경우, 피해의식은 더 강화된다.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지만, 그것을 질투라고 인식하지는 않는다. 대신 ‘저 사람들은 원래 형편이 좋아서 저렇게 사는 거야’라고 해석한다.


정작 본인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괜찮은 척 살아간다.

금전적으로 어렵지만 모임에 나가 터치페이를 하고, 술값을 내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유지한다.

그리고 자신의 형편을 가장 잘 알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그 억울함과 분노를 쏟아낸다.

“내가 이렇게 편해서 사는 줄 알아?”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억울해진다.

힘든 상황에서도 애써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공감하고 위로해 주지만, 아무리 진심을 다해 다가가도 피해의식이 강한 사람은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쟤도 결국 나를 무능력한 사람으로 보고 있겠지.’

이 생각이 불신을 더 깊게 만든다.


결국 사회적 관계도, 정서적으로 소중한 관계도 조금씩 무너져

스스로 외로움 속에 갇히게 된다. 고립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이 테두리 밖에 있지 않다.

나 또한 피해의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 정서가 낯설지 않고, 오히려 너무 잘 느껴진다.

내 안에서도 비슷한 감정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순간들을 종종 마주한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과 우리는 어떻게 관계해야 할까.

“그건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난 그런 뜻이 전혀 아니였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니”,

이런 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말 앞에서는 비난받는 불쾌감만 쌓여간다. 불편한 감정에 마음의 문을 닫고 싶어질 뿐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주 차근차근, 그리고 구체적인 대화다.

어떤 지점에서 그렇게 느꼈는지 한 번 더 물어봐 주고,

그 해석이 나에게는 얼마나 다르게 느껴졌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어”에서 끝나는 설명이 아니라,

“나는 그 순간 이런 마음이었고, 이런 점은 좋았고, 이런 점은 불편했어”

라고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설명으로 관계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피해의식은 대부분 어린 시절의 반복된 상처와 공격의 경험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나는 너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경험이

시간을 두고 관계 속에서 축적되어야 한다.


다만 이것은 누구에게나 요구해야 할 의무는 아니다.

특히 친구나 동료와 같이 가깝다고 느끼며 좋게 지내는 관계에서 더 조심해야한다.

‘내가 이 사람을 고쳐야 한다’, ‘내가 개선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오만이 될 수 있다.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면, 이해와 다정함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계속 상처받고 소진되는 관계라면 그 관계를 정리하는 선택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피해의식이 많은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결국은 모두 따뜻하게 수용받고 싶어 한다.

어린아이처럼, 조건 없이 이해받고 싶어 한다.

그건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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