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동 끝에 탄생
내게 소설의 안목에 대한 영향을 미치게 한 사람이 있다. 그는 K대 국어교육학과 다니는 군대 후임이다. 그의 배경에 대한 동경이 있어서 그런지 그가 읽는 책이 멋있어 보였다. 그를 통해서 나는 문학동네에서 매년 출간되는 젊은 작가상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전역하고 난 뒤에도 젊은 작가상을 챙겨보게 되었다. 책을 읽지 않은 나는 최소한 이상문학상과 젊은 작가상을 읽자라고 마음먹었다. 최소한이라는 의미가 왜곡이 되어 연간 독서실적이 2권이 된 사실은 웃기지만 슬픈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독서모임의 포맷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의 기호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분명한 건 가면님보다 소설을 더 좋아한 것이었다. 오히려 관심분야가 다른 점이 마음이 들었다. 관심사가 다른 두 명이 만나 교집합을 이룰 때 지평이 넓어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취향이 다름에도 독서와 글쓰기의 열망이 같은 사람을 만나서 되게 반가울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가면님 보다 독서활동이 많았기 때문에 입맛대로 독서모임의 형식을 정해 제안했다. 그렇게 3 형식(제목만 보고 감상, 독후감, 인상 깊은 구절)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정해진 틀 없이 독서모임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형식을 제안했다. 그냥 우왕좌왕 서로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러다가 그저 친목모임으로 변해 가지 않을까 걱정했다. 앞서 이야기했던 3 형식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보고 싶다.
우선 제목'만' 보고 감상이다. 제목이 생각보다 의미가 있다는 것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사람도 이름이 있듯이 책에도 제목이 있다. 내용을 함축할 수 있는 것이 제목이 될 수 있다고도 봤다. 그리고 독자들이 책을 고를 때 제목을 보고 고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작가 입장에서도 아무 생각하지 않고 제목을 정하지 않을 테니 제목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는 아주 크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 나름대로 제목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서로 가지고 있는 선입견으로 제목을 바라보고 그것을 나눌 때 좀 더 생각이 깊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두 번째 독후감을 나누는 것이다. 글의 형태로 나누기를 원했고 감사하게도 가면님은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서로의 글 센스를 확인하고 생각이 글로 정형화되어있으니 의견을 교환하기도 용이했다. 어쩌면 독서모임은 서로의 생각을 이미 다 알고 난 뒤 의문점이 생긴 빈 공간을 대화로 채워주는 시간일 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고 그게 이상적이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은 구절 나누기다. 독후감의 마이너한 버전이다. 가면님과 나에게는 독후감이 쉬운 과제였다. 가면님 또한 그랬든 글쓰기는 일상적인 활동이었다. 하지만 보통 그렇지 않았고 어려워했다. 그래서 새로운 멤버가 생기면서 인상 깊은 구절을 따로 나누기 시작했다.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작은 7개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7 작품 모두 보다 일단 대상을 먼저 다뤄보자 제안했다. 그렇게 강화길의 『음복』으로 독서모임이 시작이 되었다. 독서활동을 최근에 언제 해봤나 생각해 보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대로 읽고 독서활동 한 건 8년 전 여름이었다. 신문부 활동했던 나는 책 추천에 대한 글을 기고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어떤 책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고1 때 체벌문제로 대두가 되었던 괴짜 도덕선생님에게 추천받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표면적으로 괴짜라고 보일지 몰라도 그 선생님의 선의와 열정이 느낄 수 있었기에 분명 좋은 책을 추천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내게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추천해 주었다. 그의 후광효과였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책이었다. 기사를 써낼 때도 작품성이 있는 책이라고 극찬을 하면서 글을 썼다. 하지만 결국 어떠한 이유로 나의 기사는 채택되지 못해 신문에 실리지 못했다. 야자시간을 허비하며 책을 읽고 부단히 노력하여 글을 썼는데 허무했다.『음복』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려고 할 때 그 기억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8년의 공백이 크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그래서 그런 것일까? 몇십 페이지 되지도 않는 책을 너무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다. 구조적으로 뜯어보려고 하는 나의 노력은 독서활동인지 비평활동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리고 A4용지 한 페이지의 용량으로 독후감을 써오자 이야기했던 나는 어떻게든 한 페이지로 독후감을 함축시키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글을 많이 쓰는 것보다 정해진 분량으로 쓰는 것이 더 어렵고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면님에게 나의 글 솜씨를 뽐내고 싶은 욕구도 반영이 되었다.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핵심 갈등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갈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살폈다. 그리고 멀찍이 그것을 바라보는 독자입장 그러니까 나의 감상을 가감 없이 적어 냈다.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때보다 그 시간이 가장 솔직한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도 선보이지 않았던 모습을 생면부지인 가면님에게 드러내는 것이 걱정보다는 건강한 욕구 분출이었다. 이 작은 소도시에서 이런 행복을 맛볼 수 있다니 그 존재가 크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