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배를 처음 마주하다.- 쓴맛 넘어 달콤함
“재이 군, 교리 끝나고 제 방에 들렀다 가세요”
“네? 저 말입니까, 선교사님?”
“그래요 재이 군 말입니다.”
프란체스코 선교사는 조용히 손을 모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 오늘의 교리가 마무리되었고 다정한 목소리의 선교사는 나머지 교인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자. 오늘 교리는 여기서 마칩니다. 밤길 어두우니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아직은 서툰 우리말이지만 최대한 정확하게 발음하려 애쓰는 선교사가 우리 마을에 온 지도 벌써 1년이 지나가고 있다.
처음 그가 교리를 시작했을 땐 온 마을이 들끓었다.
어른들은 사기꾼이라며 교리 공부에 가는 이들을 막았고, 당장이라도 관가에 고발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병든 이가 생기면 그에게 먼저 묻고 법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면 선교사에게 의논할 정도다. 프란체스코 선교사가 마을에 해준 일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재이는 어머니를 따라 교리 공부에 다니고 있다.
죽은 아버지가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지만, 하루도 기도를 거르지 않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머니에게 재이는 하나뿐인 자식이자 죽은 남편 대신, 죽은 큰아들 대신 살아가는 이유다.
형을 홍역으로 아버지를 하루아침에 잃은 뒤, 기도밖에 모르게 된 어머니는 매일 밤하늘에 매달렸다. 그 기도를 옆에서 지켜보다 보니 어느새 재이도 어머니와 함께 교리실에 앉게 된 것이다.
“재이 군! 조나요?”
가끔 교리실에서 졸고 있는 재이를 보면, 걸 선교사는 부드럽게 그러나 또렷하게 이름을 부른다.. 선교사의 1차 공격이 끝나면 곧바로 어머니의 2차 공격이 이어진다.
“아 아 아파요”
어머니가 재이의 무릎을 살짝 꼬집었을 뿐인데, 아픔은 크게 느껴진다.
이렇게 교리 시간마다 간신히 눈을 뜨고 있는 재이에게 오늘 선교사의 호출이라니 무슨 일일까 걱정이 앞선다.
선교사의 방 앞에 선 재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살짝 숨을 들이쉰 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선교사는 방문을 두드리는 이가 누군지 알겠다는 듯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니 선교사는 늘 그렇듯 차분한 얼굴로 재이를 맞이했다.
“앉으세요”
재이는 선교사가 내어준 방석에 조심스럽게 앉는다.
“저 무슨 일이신지"
"급한 건 아니니 먼저 차 한 잔 할까요? "
"아 네."
머리를 한번 만지며 어색하게 웃던 재이는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십자가, 성모 마리아 상, 성경책, 그리고 작은 구급약통..
그 사이 드르륵드르륵,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재이가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니 선교사의 손에 작은 기구 하나가 들려 있다.
맷돌처럼 돌리는 그 기계 안에서는 검정콩처럼 생긴 알갱이들이 돌아가며 갈려지고 있었다.. 그 갈려진 검은 가루를 하얀 보자기에 담은 후 따뜻한 물을 부어 내리니 졸졸졸 방안 가득 낯설면서 은근한 향이 퍼지기 시작한다.
"자 드셔 보시지요. 커피라는 겁니다. 아 여기선 가배라고 하죠?"
선교사가 정성껏 내리던 그것을 재이 앞으로 내민다.
"아 네 잘 마시겠습니다."
재이는 잔을 들어 향을 맡아본다. 선교사가 한 것처럼.
고소하면서도 쌉싸름한 처음 맡아보는 향이다. 한 모금 마셔보니 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코 끝은 자구 그 향기를 다시 맡고 싶어진다.
"처음엔 쓴맛이 나지만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달콤한 맛도 느껴질 겁니다."
선교사는 잔을 들었다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재이 군. 제가 오늘 당신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
재이는 선교사의 말에 잔을 들려다 멈춘다.
"로마에서 온 선교사 친구가 다음 달에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가 조선의 유능한 청년을 함께 데려가 선교 공부를 시키고 싶다 하더군요."
"네? 선교 공부요? "
"그래요. 로마로 함께 가서 공부를 하고 다시 이 땅으로 돌아와 천주교를 전하는 선교사가 되는 거죠. "
재이는 말을 잇지 못한다.
"그간 재이 군을 지켜보며 제가 느낀 게 있습니다. 머리가 아주 총명해요. 신앙심 깊은 어머님 덕분에 마음도 곧고요. 그래서 그 친구에게 재이 군을 추천한 겁니다. "
"네? 저를요? 로마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저를 "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닙니다. 오늘은 그런 길도 있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어서 재이 군을 보자고 한 겁니다. "선교사는 마지막 말을 부드럽게 이어가며 다시 잔을 들어 올린다.
"자 일단 제 이야기는 끝났으니 커피를 마저 마시지요! "
재이는 아직 얼떨떨한 채로 잔을 들었다.
커피라는 가배 향이 자꾸 재이의 마음을 끈다.
"선교사님! 그런데 이 가배는 대체 뭔가요? 검고 쓴 거 같은데 향은 신비롭고 끝에는 달달함이 느껴지다니 너무 신기합니다."
재이의 물음에 선교사가 웃으며 대답한다.
"커피나무에서 딴 열매의 껍질을 벗겨 볶으면 원두가 됩니다. 그걸 이 기계로 갈아서 천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부어 내리면, 이걸 서양에서는 커피라고 하지요. 여기선 가배라고 합니다. 꼭 쌍화차 같은 느낌이죠? "
"아 그렇군요. 신기하네요. 참"
잔을 끝까지 비운 재이는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한 후 방을 나선다.
밤하늘이 까맣게 펼쳐져 있는 게 방금 마신 가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하늘.... 가배처럼... 검은색이네’
재이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든 게 웃음이 난다.
집에 돌아온 재이는 선교사의 제안을 어머니께 전하자 기도 중이시던 어머니가 재이의 손을 잡는다.
"가거라 재이야.. 이건 천주님의 뜻이야. "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가면 어머니는요? 누가 어머닐 돌봐요? 말도 안 돼요!"
재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밤 가배의 향이 재이 가슴에 스며드는 것처럼 재이 마음에 스며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선교사가 건넨 말을 마음과 머리고 곱씹던 재이는 그날 밤 겨울 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아침이 되어서도 좀처럼 몸이 일어나 주지 않는다. 찬물로 얼굴을 씻어 정신이 들 즈음, 담장너머로 영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헤이, 재이! 오늘은 늦네. 밥 먹었냐?"
"시끄러워 아침부터 왜 이렇게 소란이야!"
"얼른 옷 입고 나와. 술빵 가져왔어. 늦었으니깐 가면서 먹자"
영식이의 재촉에 재이는 얼굴의 물기만 대충 닦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겨울의 끝자락 찬 공기가 빈속을 더 차갑게 파고든다는 생각이 들 때 영식이가 내민 따뜻한 술빵을 입에 넣어 추위를 조금이나마 녹여본다.
"영식아 너 혹시 커피라는 거 마셔본 적 있어? "
"아 커피? 그 까만 서양 차? 들어는 봤지. 엄청 쓰다던데? 쌍화차보다 더 쓰다는데 갑자기 그건 왜? "
따뜻한 술빵을 먹으니 어젯밤 마신 가배가 떠오른다.
"어제 선교사님 방에 갔는데 그걸 주시더라. 처음 마셔봤는데 뭐랄까? 참 묘한 맛이더라고 "
재이는 자신도 모르게 선교사의 제안보다는 선교사가 건넨 낯설고도 묘한 가배의 향과 맛에 더 끌리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마을에 하나뿐인 책방으로 향했다. 사실 이 책방은 영식이 아버지가 운영하는 곳이고 장차 영식이가 물려받을 공간이기도 하다. 영식의 부탁으로 재이는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고 덕분에 좋아하는 책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
항상 따뜻하게 맞아주는 영식 아버지는 여는 날처럼 바쁘게 책을 정리 중이시다.
"어 재이 왔구나. 아직 추우니 안쪽부터 정리하자. 영식아, 새 책도 들어왔으니 손 좀 바빠지겠다."
재이는 먼지 털기를 핑계 삼아 책 한 권을 들어 코에 바짝 댄다. 종이 냄새는 언제 맡아도 마음을 안정시킨다. 마을에 이런 책방이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그의 눈에 형과 아버지의 기억이 아른거린다. 형은 폐렴으로, 아버지는 방앗간에서 일하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형을 잃은 지 채 1년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마저 재이 곁을 떠난 그날 재이는 울음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삼켰다.
재이에게 책방은 하나의 피난처였다. 눈물을 책갈피 속에 흘렸고 아버지와 형에 대한 그리움을 종이 냄새로 달랬다.
"야. 그렇게 책이 좋냐? 하여간 못 말려 진짜. "
영식의 장난 섞인 한마디에 대답 대신 웃음을 보이며 재이의 두 눈은 이리저리 바쁘게 굴러본다.
‘어디 있을까.. 서양차, 서양차에 대한 책...’
"아저씨! 혹시 우리 책방엔 서양 차에 관한 책은 없나요? "
밖에서 정리 중인 아저씨는 대답이 없다. 재이는 책방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익숙한 고서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