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가배사 재이

궁으로 간 가배사 박 재이- 드디어 리아공주를

by 엠제이


가배원 뒷마당 나리꽃이 타들어 갈 정도로 햇볕은 따갑다. 햇볕 든 자리에 재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는데 그림자의 움직임이 이 뜨거움을 이겨 내려 너무나 바쁘다.

재이의 움직임에 가배사 복장은 땀에 젖었고 가배원 입궐 당시 단정하던 머리마저 흘러내렸지만 재이의 두 손은 흘러내리는 땀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눈과 손은 생두에 가 있다.

항아리 속 생두를 꺼내 덖은 후, 불을 끄는 반복된 재이의 동작은 이 따위 더위에는 주저함이 없다.


마치 원두랑 한 몸이 된 듯이 움직이는 재이의 모습을 담장 너머에서 한동안 바라보는 리아공주를 나무라기라도 하듯이 영옥이가 말한다.

“공주님 안 돼요. 이제 내려오셔야 해요.”

“잠깐만, 잠깐 아이참!”

“누구라도 보면 어찌하려고 이러셔요. 제 모가지 날아갑니다. 빨리 내려오세요. 네?”

담장에 걸친 리아공주를 끌어내리려 하지만 쉽게 내려오지 않자 영옥이가 소리 지른다.

“아 김 상궁 마마님! 어쩐 일이신지요?”

이 소리에 깜짝 놀란 리아공주가 담장에서 뛰어내리다 다칠 뻔하였다.

“어 요것이 “

말을 듣지 않는 리아공주에게 거짓말을 한 영옥에게 눈을 흘겨본다.

"그니깐 왜 제 말을 안 듣는대요?"

가배원 담장에서 내려와 처소로 발을 옮기는 리아공주는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 마다 제1회 가배사 대회에서 본 재이를 떠올렸다.


가배에 대해 소신껏 자기 의견을 말하던 재이, 재이가 건넨 가배! 맛 또한 잊을 수가 없다.

그가 궁에 들어온다는 이야기, 그가 궁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리아공주는 더욱더 설레는 가슴을, 재이에게 첫눈에 반해 벌려 떨리는 마음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른다.

선대 황제를 따라 조선에 왔던 중국 왕자는 리아공주를 직접 만나 보고 자신이 황제가 되면 꼭 결혼을 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말에 올라타면서도 무서워하지 않으며 거침없는 행동을, 바둑을 함께 둘 때도 적대감을 가질만한 왕자인데도 속은 어쩔지언정 자신에게 친절함을 베푼 점과 간혹 하늘을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 쉬어 보이던 슬픈 눈동자의 리아공주를 잊을 수가 없어 황제가 된 지금 조선의 리아공주에게 청혼을 하게 된 것이다.

비록 중국의 황제이긴 하지만, 리아공주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다고 믿어 청혼서신을 조선으로 보낸 것이다.


”황제폐하! 조선에서 회신이 왔습니다. “

‘그래 뭐라 하던가?”

그토록 기다리던 회신이라 황제는 어찔할 줄 모르며 방안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대답을 채 듣기도 전 보채기 시작한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읽겠습니다. 흠, 흠”

“리아공주를 아껴 주시는 황제의 사랑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아직 저의 리아공주는 혼인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기에 이번 청을 거두어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뭣이라”

조선 임금의 생각을 들은 황제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이번에는 서신 대신 직접 나의 편지를 들고 대신이 직접 다녀오시오!”



궁궐 깊숙한 편전의 문이 조용히 닫혔다.

대왕대비는 곧장 문 안으로 들어서며 말을 이어간다.

“어미, 들었습니다. 또 가배를 드시나요? 요즘 잠도 잘 못 주무신다면서. 가배를?”

“어서 오세요 어머니. 제가 잘 조절하고 있습니다.”

대왕대비는 설록차가 놓인 찻잔을 내려놓으며 평온한 음성으로 답한다.

“그래. 리아공주를 보낼 준비는 하시는지요? "

대왕대비의 말에 임금은 잠시 망설이다가 정확하게 대답한다.

"어머니 리아를 중국에 보낼 생각 없습니다. 아지 어린 데다 청혼할 뜻조차 보인 적이 없는데 어찌 어머니 마음대로... "

대왕대비의 눈매가 매서워 보인다.

'달리 방법이 없지 않소! 리아에게 줄 선물을 이리 많이 가지고 왔는데 주상도 이제 "

'아니 됩니다. 어머니"

"지금 그 아이 하나가 중요하단 말이냐? 조선의 운명이 달려 있는데도 어찌 주상은 이리 말한단 말이오?"

대왕대비의 말은 겨울밤 바람 한점 없는 얼음장처럼 되어 임금의 가슴에 꽂혀 버린다.

"어머니, 리아는 제 딸입니다. 한 나라의 공주이기 전, 어머니의 손녀이며 하나밖에 없는 제 딸입니다 "

"딸? 한 나라의 왕의 입에서 나올 말입니까? "

왕의 가베 대령에 가배사 재이는 가배 잔을 내려놓고 돌아서는 순간 대왕대비와 임금의 말을 듣게 되었다.

가배를 놓고 발길을 급하게 옮긴 다호 하였으나 재이가 처소에서 나가기도 전 임금과 대비마마 사이 오가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말았다.


'아 공주님을 청으로 보내시려나보다. 아직 어리다고 들었는데 청나라라니'

재이는 얼굴도 모르는 공주가 걱정되었다. 아직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잠깐 들은 이야기가 나라의 힘없음에 이 현실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주상. 아비의 눈으로 이나 라의 현실을 보지 마시오. 주상은 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국왕이오. 리아공주가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보로 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이 아닌가요?”

임금은 대왕대비 말에 입술이 아플 정도로 이를 악 물었으며 속이 끓듯 요동친다.

“어머니 리아공주는 여기 이 나라에서 이 아비의 보살핌 아래 자기 삶을 살아가여 하오”

대왕대비는 한참이나 입을 다물었다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네가 아직 젊어서 그런가 보다. 왕은 때때로 자식 하나쯤은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그건 희생이 아닙니다. 그건 리아를 버리는 버림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칠흑 같은 새벽의 어둠 같은 침묵을 대왕대비가 먼저 깨며 말을 한다.

“곧 청나라에서 정신 사신이 올 것이며 공주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럼 어떻게 주상은 대비를 할 것입니까?”

대왕대비가 남긴 한마디에 왕은 밤새 한잠을 잘 수가 없었다.

“리아공주, 이 아비가 어찌해야 할까? 사랑하는 리아공주"

‘답답하다. 답답해 이 아비 마음이 이렇게 답답하구나’

며칠 있으면 마주하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될 중국 사신들이 임금을 기다릴 것이다.

이 밤이 왜 이리 짧게 만 느껴지는 것일까?


궁안 깊숙이 자리한 가배원, 아침인데도 향긋한 가배 냄새와 가배 가는 소리가 적절히 섞여 조용하던 가배원을 향기롭게 깨우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가배 향보다 더 진하게 가배원을 흔들어 놓는 소문을 심 가배사가 전하기 시작한다.

"들었어? 요즘 들어 가배 담장 너머로 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우리 가배원을 몰래 훔쳐보고 간다고 하는데 그 아가씨가 누굴 보러 왔을까? 나를 보러 왔다나 어쩐다나? "

"무슨 소리야? 나도 들었는데 심 가배사가 아니라 나를 보러 왔다더라 뭐!"

옆에 있던 다른 가배 사들고 콧수염을 만져가며 소문에 소문을 더 하고 있다.

"하하 이 사람이 "

"재이 가배사! 당신 생각은 어때? "

원두를 매 만지는 재이에게 갑자기 심 가배사가 묻는다.

"저요? 뭘? 워낙 가배원, 가배향이 좋으니 그 향 따라온 게 아닐까요? "

”역시 재이 가배사는 재미없어! “

"나라고 나를 보러 온 아가씨라고! "

심 가배사는 한층 더 우렁찬 목소리로 가배원을 흔들어 놓는다.

재이도 담장 너머의 그림자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누구를 보러 온 것이든, 가배원에 자주 다녀간다는 건, 가배원 식구들에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배사들이 떠들며 담장 너머 아가씨에 대해 이야기를 하여도 재이에게 그다지 재밌는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가배원은 원래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며 가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임금님이 가끔 산책하다가 들리시는 곳이며 먼 곳에서 귀한 손님들이 오면 특별히 한잔을 나누기도 하는 곳이다. 가배원에는 앉아서 잠깐 가배를 마실 수 있게 마련된 자리도 있기 때문에, 누구든 환영은 하지만 아직 일반적인 궁 식구들은 잘 들어오지 않았던 곳이다.

그런 가배원에서 일하는 재이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단 한잔의 가배의 맛과 향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아껴주었으면 하는 게, 재이의 생각이다.

"재이 가배사! 재이 가배사! 중국의 사신이 왔다네. 가배 두 잔을 만드시오 "

"중국 사신이? 맞나 보네. 중국 황제가 리아공주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

"아이고 어찌해 이쁘고 총명하다는 우리 공주님을. "

가배를 만들어 내야 하는데 갑자기 중국 사신이 왔다는 말에 담장 너머 그 아리따운 아가씨의 소문보다 더 뜨거워지며 뒤숭숭해진다.


"전하! 박 재이 가배사! 가배 대령이오."

"들이시오."

재이 가배사는 가배 두 잔을 들고 임금님 앞으로 간다.

임금님 옆에서 중국 사신으로 보이는 이가 풀어진 자세로 앉아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한잔을 먼저 임금님 앞에 내려놓으려 하는데 임금님이 재이 손을 중국 사신 앞으로 내민다.

일단 임금이 시키는 대로 가배를 내려놓고 뒷걸음으로 물러나려는 찰나에 중국 사신이 말을 건넨다.

"자네 얼굴 한번 들어보게나 어허 전하 이 사람 너무 잘 생기지 않았습니까? "

갑작스러운 사신의 말에 임금도 당황하며 잠깐 고개 들어 가배사 재이를 쳐다보게 되었다.

사신의 물음에 대답 않던, 임금이 가배를 권한다.

"어서 가배를 드시지요."

임금의 두 손은 재이를 물리라 손짓한다.

"드시오. 조선의 가배입니다."

"아! 이게 그렇게 임금이 칭찬한다는 그 가배란 말이오? 맛 한번 봅시다. 하하하"

뒷걸음치던 재이는 사신의 그 웃음소리가 너무 거슬린다.

나라의 힘이 없다는 게 이렇게 서글프구나. 하물며 아무것도 아닌 자신도 이런 기분인데 하물며 조선의 왕인 임금은 어떤 마음이실까 라는 생각이 스쳐 간다.


"공주님, 할미 마마께서 부르셔요. 빨리 준비하시고 가야 합니다. "

리아공주는 할머니가 왜 자신을 부르는지 알 거 같다. 요즘 아버지와 두 분의 사이에 차가운 기류가 공주 자신 때문이라는 걸 대충 느낌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온 편지와 이번에는 사신이 직접 황제의 서신을 가지고 이곳 조선까지 먼 길 온 것까지. 중국 황제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도 예전부터 들은 게 있기에 하지만 리아는 중국으로 끼 싫다는 게 굳은 마음이다.

예전에는 혼자 계신 아버지 곁을 떠나기 싫었고 지금은 가배원의 재이를 더 알고 싶어지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더더욱 중국으로 가기 싫은 것이다.

"할머니 리아 왔어요."

"어우. 오늘은 우리 리아가 더 예쁘구나. 이제는 시집갈 때가 되었네? "

웃음 지으며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오늘따라 진심으로 와닿지 않지만 그래도 리아는 할머니 품에 안겨본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

"아이고 우리 리아가 이렇게 할미의 일상을 물어보니 내가 빨리 답하지요. 요즘 리아 걱정에 이 할미 잠을 들 수가 없다오. 왜 그런지는 리아도 알겠죠?"

할머니의 걱정 담긴 말씀에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리아공주 이 할미가 리아에게 청이 있어 이리 불렀다오. 둘러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중국 황제의 편지며 이번 사신 방문도 모두 리아공주 때문인 걸 아시죠? "

할머니의 물음에 치마 옆선만 매 만지는 리아공주의 대답 대신 할머니가 말을 이어한다.

"리아공주! 아비와 이 할미를 위해 중국 황제의 청을 받아들여 주세요. 이 할미 소원입니다."

할머니는 리아공주 손을 꼭 잡으며 작은 두 손을 쓰담쓰담하는데, 리아의 손이 떨고 있다는 걸 애써 모른 척한다.

"할머니 죄송해요. 정말 중국으로 가기는 싫어요”

“할머니 다른 건 다 제가 들어 드릴게요. 제발 황제에게 시집만은...”

리아의 간청에 할머니는 리아의 두 손을 내팽개친다. 이겁니다.

“리아! 잘 들으세요. 이건 명입니다. 할미의 명이라고요. 리아의 행동 하나하나에 우리 조선의 앞날이 달렸다 이겁니다. 잘 새겨들으세요. 이건 할미의 명이라고요.!”
갑자기 험한 얼굴과 목소리로 변한 할머니를 뒤로 한 채 리아는 방을 나왔다.

'왜 내게 이러시나요? 왜 우리 조선은 이렇게 힘이 없나요?'

영옥이도 오늘만은 조용히 리아공주 뒤를 따를 뿐이다. 대왕대비가 리아 공주에게 어떻게 하였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아니깐.


“공주님 우리 가배원에 한번 가볼까요?”

영옥이의 말이 큰일 날 일이라는 걸 잘 아는 리아 공주이지만 발걸음은 가배원으로 향하고 있다.

이번에는 변장을 하고 담장 너머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가배원의 정문으로 들어선다.

“어 어 어”

리아공주의 행차에 깜짝 놀란 심 가배사가 뒤로 물러난다.

“뭣들 하느냐 뒤로 물러날 게 아니라 다들 앞으로 와서 공주께 인사를 하시오”

영옥이가 리아공주를 등에 업고 뒷짐을 지며 큰 소리로 가배사들을 불러 모아 본다.

“영옥아! 조용해! 다들 바쁘게 일하는데 얘가”

“아닙니다. 공주님! 뭣들 한다나 공주님께 인사를 해야지”

놀라 서 있는 가배사들에게 또다시 영옥이가 큰소리치니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위치에서 일을 하고 있던 가배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중 리아 공주는 박 재이 가배사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리아 공주가 눈빛이 가 있다는 걸 주변인들이 알 정도로 뜨겁다.

“다들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는 분도 계시겠지만 리아 공주 됩니다.!”

자신을 소개한 후 리아는 가배원 탁자에 잠깐 기대어 본다.

“아니 공주님께서 여기까지 어떻게”

놀란 가배원장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물어보자 공주는 아주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탁을 한다.

“가배 한 잔 주세요”

“아주 진하게 한 잔 주세요. 가배가 너무 마시고 싶어서 이렇게 왔답니다.”

“아니 영옥에게 주문을 하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가배사가 직접 들고 갈 텐데요”

리아 공주는 머릿속을 정리하였다.

'가배도 마시고 싶었지만, 박 가배사가 보고 싶었답니다. 오늘 같은 날 박 재이 가배사를요'

가배를 마시고 싶다는 리아 공주의 한 마디에 가배사들은 재빨리 움직이는데 그중 공주의 눈에 단연 재이 가배사가 눈에 띈다.

“뭣들 해요 다들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고”

영옥이는 또다시 공주를 믿고 호탕을 치니 심 가배사는 아니꼽다는 듯 콧방귀 뀌는 소리를 내어 영옥에게 보낸다.

잠시 후 가배를 들고 온 재이가 탁자 위로 살며시 내려놓자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감사의 인사를 하는 공주의 말이 채 끝나기 전 재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려다 다시 숙인다.


‘어 이 목소리는! 그때 심사하던 감독관의 목소리! 나에게 질문을 던진 그 여인의 목소리잖아!’

‘그리고 이 향기는 그때 그 여인에게서 나던 꽃향기였는데’

재이는 궁금하지만, 공주님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더 들지 못한다.

"가배가 진짜 맛있어요. 아버지께서 왜 이리 가배를 찾으시는지 알 거 같아요. 편전에서 마시는 거보다, 가배원 탁자에 앉아 마시니 가배향에 둘러앉아서 그런지 향이 더욱 좋네요."

리아 공주는 호호 웃으며 가배사 재이를 쳐다보지만 재이는 복잡한 머릿속 때문인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 가배를 내린 가배사인가요? 고개를 드세요"

리아 공주의 말에 재이는 어쩌줄 몰라하다가 공주의 명이기에 고개를 들어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을 확인해 본다.

"이렇게 맛있는 가배를 내려 주어 감사해요. 오늘 너무 피곤한 하루였는데 이 가배로 조금은 감정을 추 스릴 수 있을 것 같네요"

리아 공주는 진심을 다하여 가배원 식구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중이다.

‘아 그 여인이 공주였다니”

'아 말로만 듣던 리아 공주가 바로 그 감독관일 수도 있다니'

정정당당하게 가배원 정문으로 들어와 마음에 품고 있던 재이를 본 리아 공주는 역시 자기가 사람을 잘 봤다는 생각을 더 깊이 하게 되었다.


가배원을 나오며 재이의 수줍게 웃던 얼굴이 자꾸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리아 공주를 영옥이는 뒤따라오며 놀리는 중인데 어디서 나왔는지 갑자기 중국 사신이 팔짱을 끼고 떡 하니 서 있다.

“안녕하십니까? 공주님!”

“안녕하세요?”

가벼운 인사를 주고선 뒤돌아서려는데 사신이 거친 한마디를 더한다.

“가배원에는 무슨 일로 다녀오시는지요? 공주님께서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가요?"

사신의 날카로운 물음에 영옥이가 욱해 말을 던져 버린다.

"무례하오. 감히 어디 안전이라고 함부로 공주님께 이런단 말이오."

"공주님! 어서 가시지요. 비키시오."

영옥은 사신에게 날카로운 시선과 욱한 말을 내 던지고선 공주의 손을 잡아 재빨리 이곳을 벗어나고자 이끈다.

하지만 중국 사신은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다.


"전하! 중국 사신이 뵙기를 청합니다."

"무슨 일이고! 들라하라 "

‘아직 만나기로 한 날짜가 아닌데 무슨 일로 이리 나를 찾는단 말인가’

거침없는 발걸음을 임금 앞에 내딛던 중국 사신이 앉으라는 명도 없는데 털썩 앉으며 말을 이어간다.

"전하! 리아 공주께서 가배원이라는 곳에 드나드는 걸 아시나요? "

사신의 말에 임금은 놀라지만, 차마 내색은 못한다.

"무슨 말씀인지요? "

"황제와 결혼이 오가는 공주가 가배원에 자주 나타나 가배원 남정네랑 이렇다 저렇다 소문이 돌아야 합니까? 궁 안에서 이상한 소문이 돈다는 거 아시나요? "

"대체 무슨 소문 말입니까?”

임금은 말도 안 된다며 손을 저으며 큰소리쳐 보지만 자꾸만 중국 사신의 말이 신경 쓰여 머리가 지끈 해 온다.

“전하! 공주의 몸 가짐을 조심시켜 주십시오. 앞으로 황후가 되실 분인데 이런 소문이 나야 되겠습니까? 본국의 황제가 들으시면 어찌하려고 이러실까요?”

중국 사신이 물러난 후 임금은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정말 공주가 가배원에 간단 말인가? 진짜 그 소문이 사실이려나'

가배원에 자주 나타나는 리아 공주 때문에 가배원도 비상이다.

갑자기 나타나 오늘은 부드럽게, 오늘은 진하게. 오늘은 꽃향기 나게, 비 오는 날 마시기 딱 좋은 가배로, 화창한 날은 어떻게 마실까로 모든 가배사들을 당황하게 만들어 공주가 나타나면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가배사들이 우왕좌왕할 때 딱 한 사람 재이 가배사는 그저 웃음만 지을 뿐이다. 언제부터가 미소가 떠날 줄 모르는 재이를 보고 심 가배사가 놀리기도 하였다.

”재이 가배사! 요즘 무슨 좋은 일 있나? 웃음이 떠나질 않네. “

”요즘 연애를 하나? “

옆에서 듣고 있던 선배 가배사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그렇다. 정말 맞다. 재이는 요즘 너무 크게 웃고 싶다. 마구마구 웃고 또 웃고 싶어진다.

당당하게 가배원의 문을 넘어선 리아 공주는 그 후 자주 가배원에 나타났고, 어느 날 영옥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가배원 일을 마친 후 수국정원으로 오시오. 리아 공주'

편지를 읽어 내리는데 무슨 일로 부르시나 걱정이 되기보다 감독관이었던 여인을 다시 마주 보게 되는 설렘을 더 느끼는 재이었다.


여름밤 별빛, 달빛에 물든 하얀 수국이 정원을 온통 하얗게 만들어 대낮보다 더 아름답게 수국은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이 하얀 수국 빛이 멀리 서 있는 리아 공주를 더욱 아름답게 비추는데 그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다는 표현도 아까울 정도로 재이의 두 눈이 부실 정도이다. 차마 그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발걸음도 채 떼지 못할 때 영옥이가 재이를 공주 앞으로 민다.

"공주님, 재이 가배사 왔어요? "

"안녕하세요 공주님 "

그제야 재이는 정신 차리며 인사를 한다.

"오시라 해서 놀라셨죠?"

"아 네.."

"그리 놀랄 일 아닙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고개 못 드는 재이를 보며 공주는 안심시킨다.

"낮에 마신 가배가 이상했나요? 혹시?"

"호 호호 무슨 말이에요? 재이 가배사는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나요? 가배 내리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걸 아직도 모르시나 봐요. 제1회 가배사 대회에서 1등 한 분이!!"

리아 공주는 재이가 참 순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 놀리고 싶어진다.

"그럼 혹시 그날 심사를 맡은 감독관 중 한 분이 맞죠? 그 여인이 공주님 맞으시죠?"

재이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공주에게 다급하게 물으며 확인을 해본다.

맞다. 그날의 그 여인이 리아 공주였다.

수국정원에서의 둘만의 만남이 있은 후 리아 공주와의 비밀스러운 만남은 자주 있었으며, 가배원과 수국정원을 넘나들며 두 사람은 그들만의 사랑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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