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
독립서점 개인취향의 문을 열던 순간, 잠시 숨이 멈춘 듯했다.
주인장의 손글씨로 적힌 추천 문장들,책들이 길게 뿜어내는 조용한 향기,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온도. 도서관보다 더 좋았다. 더 조용했고, 더 생생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아샘이 먼저 도착해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갓 내려준 커피향이 은은하게 가게 안에 퍼지고,
작은 다과가 테이블 위에 예쁘게 놓여 있었다.
“다과는 더 준비되어 있으니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그 문장 하나에까지 정성이 묻어 있었다. ‘아, 오늘 이 모임은 이미 반은 성공이다.’ 그런 느낌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잠시 후 빛나샘이 들어오고, 이어 용인에서 먼 길 달려온 민하샘이 도착했다. 한 달 만에 다시 마주 앉으니 반가움이 먼저 얼굴에 피어올랐다. 반가움을 천천히 가라앉히고 각자 준비해 온 책을 꺼내어 읽고, 필사하고,
다시 모여 문장을 나누었다. 책에서 시작됐지만,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사람’에게로 흘러갔다.
며칠 전 읽었던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의 구절을 나는 조심스레 꺼냈다.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을 심판한다.
누구는 착하고 누구는 악하며
누구는 멍청하고
누구는 똑똑하다는 식으로.
사람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존재여서
매일 그 모습이 다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좋은 엄마가 되어보겠다고 여러 강의를 다녔는데,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 중 유독 기억에 남은 것이 판단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문득 돌아보면, 내 말들 속엔 생각보다 많은 판단이 숨어 있었다. 그걸 알아차리고 난 뒤부터 말을 고르기 위해 잠시 멈추는 습관이 생겼다.
며칠 전 결혼식장에서 나는 조금 불편한 순간을 겪었다. 친구가 신랑과 신부의 인상을 이야기하며 말했다.
“신랑은 착해 보인다.”
“신랑 아버지가 엄마보다 더 좋아 보이네.” 대체로 좋은 말들이었지만 어쩐지 그 순간 마음이 서늘하게 식었다. 잠깐 본 사람들에 대해 단정적인 말들이 그날따라 유난히 거슬렸다. 우리가 얼마나 상대를 안다고 그렇게 쉽고 빠르게 말을 던질 수 있을까.
사람은 계속 변하는데. 아침의 생각과 저녁의 내가 다르고,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내가 다를 텐데. 그런 흐름을 모른 채 내려진 판단이 얼마나 쉽게 누군가를 가두는지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나는 한때 ‘변화’를 의심하던 사람이었다. 변하는 것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일관성과 변화와 변절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작고 단단한 세계관이 오래도록 나를 지배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이를 먹고, 생각이라는 걸 하다 보니 변화는 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판단은 그렇게 은근하게 스며든다. 말의 어조, 표정, 작은 버릇들 속에. 내가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도 전에. 딸아이가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내게 했던 말이다. "엄마는 왜 나를 맘대로 판단해?"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은 지금도 선명하다. 자녀의 말은 부모에게 가장 정확한 거울이기도 하다. 그 이후로 나는 판단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삶을 재단하지 않으려 노력을 해왔다. 민하샘은 책을 가져오지 않아 주인장의 추천글이 맘에 들어 블라인드 북을 가져왔다. 주인장 말로는 좋은 책인데 잘 안 나가서 이렇게 해 놓으니 오히려 잘 팔린다고 했다. 포장을 뜯는 순간 우리 모두의 시선은 책으로 쏠렸다. '탱자'민하님은 그 안에서 안규철님의 '어린 시절 창가에서'를 읽어 주었다. 과외샘이 벌로 창가에 서서 보이는 풍경을 말하라고 했다는 이야기였다. 문장들도 맘에 들었지만 과외샘이 더 궁금해졌다. 이런 멋진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정말 행운이다.
빛나샘은 얼마 전 다녀온 독립출판 페어 이야기와 함께 사온 책들을 보여주었다. 크기도 내용도 각기 달랐다. 인상 깊었던 건 일본 통조림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만든 것이다. 모두들 '하나의 관심사가 이렇게 책으로 만들어지는구나.' 책을 펼칠 정도로 하나에 빠질 수 있는 그 행동을 부러워했다.
미아샘은 옛이야기 주제로 4명이서 라방을 하는 데 그 준비를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욕에 관해서, 자신은 욕을 하고 싶은데 못하는 이유도 알고 싶다고 했다. 글쓰는 과정을 통해서 답을 찾기를 바란다고.
독립서점 개인취향에서의 글쓰기 모임 나시의 첫 만남은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는 자리였지만 각자의 삶을 살피는 시간에 더 가까웠다. 누구도 가르치지 않고 누구도 평가하지 않고 그저 마음에 남았던 문장 하나를 꺼내어 자기 안의 세계 일부를 보여주었다.
참 자연스럽고, 참 좋다. 헤어지자 마자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