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 거제도로 유배된 유섬이와 피난 온 윤봉문 요셉 일가
'내일은 어디로 갈 거야?'
'글쎄요, 거제도에 있는 성지를 가볼까요?' <한국 가톨릭 성지 지도>를 펼쳐 계획을 세웠다. 순교자의 딸 유섬이 묘를 들렸다 점심을 먹고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를 다녀오기로 했다.
내간리 송곡마을에 도착해 마을 사이 좁고 구불구불 한 길을 한참동안 올라가니 유처자 묘라는 표지와 십자가를 발견했다. 계단을 올라가니 보살필 손길이 필요한 유처자 묘, 묘비석 일부와 안내판이 있다. 관리가 잘 안되어 보는 나는 안타까웠다.
유섬이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와 신희의 딸이었다. 부모님과 두 오빠와 올케까지 모두 순교하였고 9살 유솜이는 거제도로, 6살 동생 유일석은 흑산도로, 3살 동생 유일문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동생들의 흔적은 어느 곳에도 남아있지 않지만 유솜이의 기록은 다행스럽게 거제 부사를 지낸 하겸락의 문집에서 발견되었다. 문집 <사천유집>에 기록된 '칠십 일 세 유 처녀지묘'를 근거로 어렵게 유솜이 묘를 찾게 되었다.
유섬이는 9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가 순교한 뒤 1801년 10월 전주에서 거제도까지 걸어왔다.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거제현감은 그녀를 내리에 있는 한 할머니의 양녀로 보냈다. 유섬이는 신앙에 헌신하고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며 고독한 삶을 살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위해 결혼을 주선하려고 했을 때, 그녀는 처녀로 남고 싶다는 의지를 단호하게 표현했다. 그녀는 평생을 홀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부사 하겸락은 그녀의 장례비를 아낌없이 지불하고 그녀를 기리기 위해 묘비까지 세웠다. 어린 시절 가족을 모두 잃고 전주에서 거제도까지 길고도 험난한 여정을 견뎌온 유섬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녀를 만나고 그녀의 이야기를 간직한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나와 남편과 같은 순례자들은 오늘날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과 희생을 알게 되었다.
지인의 말을 따라 찾아간 지심도 횟집. 점심시간이 지났음에도 자리를 겨우 찾을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였다. 2인 정식을 주문하고 갓 잡은 제철 회를 시작으로 물회, 생선구이, 초밥, 튀김과 매운탕까지 신나게 먹었다. 이런 가격에 이런 퀄리티라니 남편과 나는 눈을 마주하며 웃음을 주고받았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지세포리에 있는 윤봉문 요셉 성지를 향했다. 윤봉문 요셉은 경주 근처에서 윤사우 스타니슬라오와 막달레나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그의 가족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거제도로 건너오게 된다. 거제도에서도 윤봉문의 부친은 비밀리에 천주교 신앙을 전파했다. 1887년 경상도 담당인 로베르 신부가 성사를 주고자 거제도를 방문해 활성화되었지만, 그 이후 거제도에도 박해의 바람이 불어 윤봉문도 잡혔다. 그는 배교를 거부하고 진주에서 순교했다. 1886년 병인박해 이후 자유롭게 포교 활동이 가능했음에도, 거제도에서는 포졸이나 관리들의 사적인 욕심에서 교우들 은 계속 박해를 받았다.시신은 진주 장재리 공소 교우들이 공소 뒷산에 가매장했다 10년 뒤 1898년에 거제도로 모셔와 쪽박골에 안장하였다. 지금 자리로 이장을 한 것은 2013년이다.
성지에 들어서자 먼저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 표지석을 우리를 맞이했다. 성모상 앞에 윤봉문 복자의 묘지석이 보인다다. 그 뒤로 이국적인 야자수와 팜파스가 가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성지 안에는 순례길 1,2,3번이 있었고, 그중에 난 가장 많이 걸을 수 있는 길을 골랐다. 남편은 짧게 걷고자 했으나, 모르는 척 ‘이쪽이 맞아요’ 경당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경당으로 가는 길은 가파른 편이었지만,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어 상쾌했다. 경당 앞에는 빨강 상사화와 보라색의 작살나무 열매가 순례객들을 반겨주었다. 이곳에서는 주일 오전 11시와 목요일 오전 11시 (후원자들을 위한 미사)에 미사가 봉헌된다. 경당을 나와 남편은 잠시 길 선택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이번에도 남편은 짧은 코스를 원했지만, '멀지 않을 것 같으니 위쪽으로 가요.'라는 내 제안으로 역방향으로 로사리오 길을 걷게 되었다.
로사리오 길이 끝나니 데크로 만든 넓은 공간이 보인다. 바다도 보인다. 데크 중앙에 죄인들이 쓰던 칼 모양의 순교자탑을 만났다. 순교자 탑엔 3개의 십자가 있고, 뒤편엔 윤봉문 순교 복자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남편도 이제는 순교자들의 유해 앞에서 성호를 긋고 묵상하기 시작했다. 강요했다면 거부했을 텐데, 스스로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바다가 보이는 포토존에 잠시 앉아 이 성지에 깃든 순교 성인과 성지를 조성하신 분들을 위해 감사 기도를 드렸다. 십자가의 길 14처를 보더니 남편은 '우리 거꾸로 돌았네.'라고 말했다. 나는 '알고 있었어요, 되돌아가자고 하면 지름길로 갈 것 같아서 조용히 있었죠.'라고 웃으며 답을 했다. 대나무 숲과 울창한 편백나무 숲길을 따라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거슬러 내려갔다.
내려와서 다시 거제도내 천주교 순례길 안내도를 보며, 봄에 수선화가 만발한다는 공곶이에 가기로 했다. 윤봉문의 가족의 피신처이기도 한 공곶이.
차에서 내리면 바로 보일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순례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 길 양쪽에 핀 상사화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사화는 씨로 번지나?' '아니요, 구근으로 번식하는 것 같아요.' '우리 집에서 자랄 수 있나?’ ‘큰언니네 핑크색 상사화가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 우리 집에선 월동이 안될 수도 있어요.' 산길이 끝날 즈음 바다가 보였다. 몽돌 해변을 걸으며 사람들이 쌓아둔 다양한 돌탑들을 구경했다. 각각의 돌탑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담겨있겠지 싶었다. 하나 하나 돌들을 올려 소원을 빌었을 그들을 위해 화살기도를 날렸다.
공곶이에 도착해 봄에 필 수선화를 상상하며 사진을 찍었다. 수선화 뒤로 커다란 야자수가 있고 반대편 섬까지 보인다. 사진을 찍기위해 사람들이 찾아올만 하다. 가는 길은 멀게, 힘들게 느꼈졌지만 돌아오는 길은 금방이었다.
마지막 목적지인 서이말 등대를 향했다. 차가 마주치면 피할 수 없는 외길이다. 군데군데 경적을 올리라는 표지판이 있다. 차를 주차하고 등대를 찾아가려는데, '문 앞에 주차한 검은색 차 헬기장 주차장으로 이동해 주세요.'라는 방송이 나와 너무 놀랐다. 군부대 앞이었다. 차를 헬기장 주차장으로 옮겨 놓았다. 여기도 출입 금지, 저기도 출입 금지 표지가 있어 들어가도 되나? 불안한 맘으로 움직이며 서이말등대 사진만 멀리서 찍고 재빨리 나왔다.
이렇게 마산교구 거제도 안에 있는 성지 유섬이 처자 묘와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를 방문하고, 아주 짧은 도보 순례로 하루를 보냈다. 오늘은 원치 않은 에피소드가 많이 생긴 날이었다. 유섬이 처자가 진산 성지에서 이름을 알게 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딸이란 사실과 로베르 신부님 이야기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아직도 궁금하다. 감히 순교자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다. 그 마음을 알아지는 날이 오기를 조용히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