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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크가드너 Oct 31. 2024

낙동강변명례성지:소금성당과 기와성당의 이야기

마산교구 첫번째 성당 명례성지의 성모승천성당과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

명례성지는 내게 작은 변화를 일으킨 곳이다. 소금성당이라 불리는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과 기와성당이라 불리는 성모승천성당이 있다. 

명례성지는 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낙동강변에 있다. 신석복 순교자 생가터 옆에 복자를 기념하기 위한 곳이다. 오토캠핑장과 드넓은 명례생태공원이랑 연결이 되있어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방문하면  좋을듯하다. 

둑방길에서 아래로 내려가니 성벽처럼 느껴지는 하얀건물이 있다. 주차하고 걸어들어가니 커다란 나무와 함께 단정한 건물이 나타났다. 커다란 화분에 담긴 수생식물에  우리 부부의 눈은 고정이 되었다. 남편이나 나나 둘 다 식물에 대한 관심사가  있는 것에 새삼스러이 감사하다.


성지 위쪽으로 올라가는 왼편으로   성모광장이 있다. 광장에 오래된 나무와 십자가의 길 귀여운 조형물이 눈낄을 끌었다. 


길을 좀 더 올라가니 오른쪽으로 나타난 기와성당과 옛날  종탑이 우리를 부르는 것같았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기와성당 문을 열었다. 좌석이  남자 교우석과 여자 교우석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생경한 풍경을 보았다. 어디에 가서 앉아야 하나 순간적으로 고민이 되 어느쪽도 아닌 뒤쪽 의자에 가 앉았다. 이 건물은 1927년에 새로이 건축되었다, 1936년 태풍으로 인해 성전 지붕이 날라갔다. 그럼에도  감실위 십자가 위에 모셔진 원죄없이 잉태된 마리아상과 감실은 하나도 다치지 않고 처음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기도하는 분이 있어 나도 조용히 앉아 예수님께 시간을 내 드렸다. 딸 아이의 힘듦이 나의 탓인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최선을 다해서 키운건 맞는데, 왜 이렇게 삐걱거리나 싶다. '아이도 나도 뒤 그만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앞으로 나아가도 문제는 생기겠죠. 그 문제를 해결할 힘을 주세요.' 


기도를 하고 나오니 남편이 사라졌다. 기념성당쪽으로 먼저 갔나? 잔디밭 끝쪽에 신석복 복자 기념성당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예수님 부활경당 표시도 있다. 입구엔 임상옥 조각가의 신석복 순교자의 조각상이 있다. 주차장에서 본 건물의 모습과 성지내에 들어와서 볼때 모습은 많이 달랐다. 기와성당을 기준으로 했을 때 기념성당은 한참 아래에 있고 두 성당 사이에는 기념성당 자리에 계단으로 된 야외석과 그 반대편 쪽으로 야외 제단이 있었다.  기념성당을 아래쪽에 지은 것은 녹는 소금을 상징으로 기와성당보다 낮게 지었다고 한다. 성당과 경당 안 모습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한 맘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오른편 위쪽에만 창문이 있지만 내부는 환했다. 정면 십자가상 뒤에 창문이 있다. 단순함의 미학이라고 해야 할 듯, 건축가의 설명을 듣고 싶을 만큼 멋이 있다. 성전 왼편쪽으로 부활경당으로 가는 표지가 있다. 경당으로 가는 중 예수님 고상이 보이는 순간 울컥했다. 아주 작은 경당이다. 예수님과 마주 앉아 있는데 울음이 나왔다. 울리는 울음소리에 너무 놀라 멈추려하지만 눈물은 계속 흘러 내렸다. 한참을 울고 나니, 나를 스스로 용서하라는 소리가 가슴에 울렸다. 나를 용서한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물론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용서라는 의미가 내겐 너무 커서 내가 사용하기엔 적절한 단어가 아니었다.  뭔가 잘못됐거나 사람사이에 관계가 원만하지 않을 때 나를 책망하기 바빴다. 용서가 뭐 별거라고 그랬을까? 괜찮아, 너 잘 살아 왔어 라고 위로와치유를 받는 느낌이었다. 산뜻한 맘으로 일어서니 순례자들이 성전 안으로 들어왔다.남편이 같이 움직였다면 난 경당에 앉아서 예수님과 마주하지도 않고 슬쩍 보고만 나왔을 것이다.  오로지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과 공간이 너무 감사하다. 신석복 순교자의 유해가 있는 이 경당이 야외제대가 있는 곳에서 보이는 순교탑이었다. 통으로 된 사각기둥 위쪽으로 빛이 은은하게 들어와 편안함을 주었다. 


1828년에 신성복 마르코 복자는 밀양시 명례리에서 태었났고 비교적 넉넉한 집안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때 신석복은 장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잡혔다. 체포소식을 들은 형제들은 돈을 주고 빼내려 했지만, 형제들에게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했다. 말양에서 대구로 옮겨져 모진 고문을 받았고 회유를 받자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다." 라고 해 교수형에 처하게 된다. 1866년 3월 31일 성토요일이었고 나이는 39세였다.

 순교 후 그의 아들 신영순 이야시오가 부친의 유해를 찾아왔지만 박해의 여파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하는 집안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었다. 110여 년이 지난 1975년에 진영 본당 신자들이 본당 공원묘역으로 이장했다. 신석복 마르코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광화문에서 시복되었다. 2011년에 복자의 생가 터를 매입해 야외 돌제대를 설치했다. 같은 해  기와 성당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 526호 지정되었다. 현재 성지에서는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있으며 복음화 학교 운영과 녹는 소금을 운동을 통해 순교자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사라진 남편을 성물방에서 만났다. 수녀님과 이야기를 하며 내게 줄 묵주를 고르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서며 '여기 정말 마음에 들어요. 부산 다시 오면  여기 와서 미사하려구요, 숙소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가능하지, 40분정도 걸릴꺼야.' 예수님 부활 경당에  앉아 다시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다음 행선지인 박대식 빅토리노 묘를 찾으러 갔다. 진입로가  도로에서 급회전해야 해 좀 위험하다. 산중으로 조금 올라가면 묘지가 나온다. 

박대식 빅토리노는 부친과 형제들 모두 신앙생활을 하다가 병인박해 때는 무사히 피신을 했으나  1868(무진박해)년에 조카인 박수연과 붙잡혔다.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고수해 참수당했다. 가족들이 선산에 모시려 하였으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 사람들이 반대해 마을 뒤산 챗골 유씨 문중 산에 봉분없이 묻었다. 세월이 한참 흘러 1956년에 순교자부인의 묘 이장을 한 후 봉분을 만들었다. 세례명이 분명치 않아 임시로 로렌죠라고 했으나 2001년  빅토리노 임이 밝혀졌다. 


마산교구 첫본당인 명례성지 성모승천성당(기와성당)과 석복 마르코 순교 복자 기념성당과 부활경당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했을때 회개와 기쁨의 눈물을 경험했다. 내겐 치유의 장소 명례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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