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를 보내며
사과밭에서 일하다 말고 앉아서 쉬고 있다. 한낮의 온도가 36도를 넘나 든다. 다행히 사과밭에는 사과나무 그늘이 있어서 따가운 햇빛을 가려주고 있다.
이웃집 창고에서 살고 있는 고양이 세 모녀가 사람소리에 빼꼼히 작은 얼굴을 내밀고 쳐다보고 있다. 나와는 벌써 구면이다. 엄마는 3년 이상, 언니는 작년에 났으니까 작년부터, 아기는 올해 났으니까 올해부터다. 친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캔 통조림 간식을 주고난 얼마 전부터이다.
가져온 캔을 바닥에 톡톡 치며 신호를 보내주니 소리를 듣고 엄마 고양이부터 먼저 내게로 다가와서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언니와 아기 고양이도 모여든다. 캔을 따서 먹이 그릇에 담아준다. 번갈아 가며 맛있게 잘 먹고 있는 모습을 본다. 서로 싸우는 법이 없다. 아기 고양이부터 등을 살살 쓰다듬어 준다. 모두가 먹는데 열중해서 만지든가 말든가 이다. 이들이 기대했던 대로 잘 먹어주니 일부러 사서 가져온 보람이 있다.
거래하던 대기업의 한 임원이 행사에 초청한 금융기관 직원들에게 항상 하던 말이 떠오른다. 손님으로 잔치집에 와서는 맛있게 잘 드시고 가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했다. 체면 차린다고 사양하며 삐죽거리고 있으면 보기에 불편할 뿐이다. 오늘 고양이 모녀들을 본다. 간식을 누가 준 것인지 가리지 않는다. 그냥 맛있게 남기지 않고 잘 먹기만 할 뿐이다. 지켜보는 내내 귀엽고 이쁘게만 보인다. 눈이 즐겁다.
뙤약볕에 사과나무를 돌보며 일하고 있는데 전화가 자꾸 온다. 토지 매물 방금 새로 하나 나왔으니 빨리 사두라는 것이다. 금방 팔리고 남아있지 않을 것이기에 수백만 원 보증금부터 먼저 입금해 놓으라는 것이다. 내가 필요해서 알고 부탁한 것도 아니다. 소득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 퇴직한 내게 땅 투자라니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매입하고 나면 몇 배로 가치가 상승한다는 것이다. 모르는 낯선 사람이 아니다. 현직에 있을 때 고객으로 도와 드렸던 사람이다. 서로 잘 아는 사이이므로 결코 나쁜 의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형편이 아닐 뿐이다. 이제 자꾸만 독촉하는 전화가 부담스럽다. 이 분과의 사이가 오래갈 수 있을까 싶다. 보지도 못한 땅을 사라며 자꾸 돈부터 보내라고 하니 참...
돈을 보내라는 그 자체는 항상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상대방이 결정하기를 다그친다. 급해서 그러는데 지금 당장 얼마를 보내주면 언제까지 반드시 갚겠다고 한다.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안중에 없다. 그리고 갚아야 하는 날이 되면 잠수를 탄다. 독촉하면 짜증부터 낸다. 내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이번도 그렇게 진행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들이 상대방에게 금전적으로 요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사랑한다면 집착하지 말고 놓아 주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의 자유를 깨뜨리며 관계성을 계속 유지하기란 힘들다. 더군다나 선을 넘고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며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절대 원치 않는다. 내게 토지에 대한 투자를 권유하는 분도 진정 나를 이해하고 존중한다면, 진정 내게 이익되고 도움 되게 할 의향이 있다면 아예 그 땅을 본인이 먼저 매입해서 등기까지 나의 이름으로 깨끗하게 완료한 뒤 미래수익을 담보로 내게 비용청구를 한다면 혹 모를 일이다. 내가 응하지 않는다면 그가 스스로 제삼자한테 넘겨도 되는 일일 수 있으니.
사과밭에서 고양이들과 헤어져 돌아와 한 군데 텃밭에 들른다. 방울토마토가 주렁주렁 달려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어쩐지 사과밭에서도 토마토를 먹고 싶더라니...
키가 자라 벌써 나의 키를 넘어서고 있다. 줄기가 바람에 또는 제풀에 넘어지지 않도록 지지대에 끈으로 고정시켜 준다. 그리고 잘 익은 방울토마토를 한 바구니 따서 집으로 들고 온다. 물에 한번 헹궈 입에 넣는데 탱글탱글 식감이 매우 좋다. 비타민 C가 많으니 약국에서 사서 따로 챙겨 먹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시력건강에 도움이 되는 비타민 A도, 칼슘처럼 뼈 건강에 좋은 비타민K도 토마토에 들어있다고 한다.
사람을 응대하다 보면 힘을 얻기도 하지만 종종 예상치 못한 일로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과밭에서 마음껏 뛰노는 고양이 세 모녀나 사과나무나 토마토 같은 작물들에게는 그럴 일은 없다. 내게 무리하게 요구하거나 보채는 일이 없다. 전화도 하지 않는다. 찾아오지는 더욱 않는다. 혹시라도 찾아와서 이야기를 해준다면 오히려 고맙겠다. 그들은 나를 이용해서 덕을 보겠다는 저의라고는 없다.
무엇보다 이들은 한결같이 내게 기쁨이자 즐거움 그리고 보람 그 자체이다. 삶의 활력소이고 재충전이다. 그래서 다소 마음에 상처가 되는 일상이 찾아온다 해도 이를 능히 회복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내게 감사와 고마움이다. 이들에게도 나로인한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결실의 아름다움이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