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물
무척 후덥지근하다. 8월 초. 이제 한 달여만 더 견디면 9월이다. 9월이면 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다.
교회에서 예배 마치고 밖으로 나서니 더운 열기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옆에 있는 친한 집사님의 얼굴을 한번 빤히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나의 태도에 집사님이 약간 당황한 눈치다. 얼굴에 뭐가 묻었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입을 가리며 조용히 말했다. 말을 했다기보다 시늉만 그렇게 한 것이다. 그가 내게 알아듣지 못했다며 한번 더 말해 달라고 했다. 혹 남들이 들으면 안 된다는 듯이 또다시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재빨리 말했다. 그러나 아까보다 조금 더 큰 소리이긴 했지만 소리만 흉내 냈을 뿐 실제로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또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는 당혹감이 집사님의 얼굴을 스쳐갔다.
이번에는 집사님이 되묻기 전에 천천히 말해 주었다.
"더워서요. 너무 덥죠? 집사님 얼굴에도 땀방울이 맺혔어요."
집사님은 그제야 긴장된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웃으면서 내가 하는 말에 공감을 했다.
"진짜 덥네요"
이어서 내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한마디, 마무리 멘트를 했다.
"그런데 더운 여름에 누가 자꾸 보일러를 트는 걸까요? 집사님"
다소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가끔 친한 사람한테 저지르는(?) 대화법이다. 심각한 듯한 말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 다소 엉뚱한 말로써 끝을 맺는.
한번씩 이 여름의 열기를 모두 모아서 보관해 두었다가 추운 겨울에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반대도 그렇다. 겨울의 찬 공기를 가득 모아 두었다가 더운 여름에 꺼내 쓰면 얼마나 시원할까.
내가 시골에서 사과농사를 짓고 있는 줄 알고 계신 분이 내게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농사일 힘들죠? 무척 힘들다고 하던데~"
내가 말했다.
"네 힘들죠. 아무나 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저는 아주아주 쉬운 일만 합니다. 아직 초보니까요. 그래서 저는 농사일이 하나도 힘들지 않답니다."
그분은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셨다.
누굴 만나더라도 자꾸 이렇게 말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다. 더위를 먹어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쉬우면서 하나도 힘들지 않은 농사일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요즘은 더워도 너무 덥다. 여름이 예전의 여름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때의 여름보다 훨씬 더 덥고 숨이 막히는 느낌이다. 더욱이 이러한 무더위 속에서도 농사일은 멈출 수 없기에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오죽하면 빨리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봄이 새로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모두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 자연 만물과 현상을 통한 일반계시와 성경말씀을 통한 특별계시를 베푸셨다. 성경말씀은 두고라도 자연만물과 현상을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걸작품들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섭리대로 이루어진다. 손톱만큼도 지나치는 일이 없으시다.
힘든 여름 무더위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께 무턱대고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 여름을 속히 보내시고 살기 좋은 가을이 빨리 오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기도한 대로 하나님의 응답이 이루어진다면 큰일이다. 여름철 동안 한창 자라고 있는 모든 작물이 갑자기 가을을 맞닥뜨리게 되면 자라다만 곡식은 모두 쭉정이로 남고 만다.
들판의 벼는 이 여름날 30도 이상의 고온에서 자라고 광합성을 해야만 쌀을 만든다. 사과열매가 지금 한창 굵어지고 잘 자라고 있는데 이대로 훌쩍 가을이 와 버리면 설익은 풋사과다. 익지 않은 풋사과는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때'가 지금은 여름이다. 하나님은 또한 가을을 준비하고 계시고 그것은 반드시 여름이 지나야 우리 곁에 오게 되어 있다. 여름이 없는 가을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성경에 '에스더'가 있다. '욥기' 바로 앞이다.
에스더에서 바빌론의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왕이 어느 날 밤이 늦도록 무다이('어느 날 갑자기 생각 없이'라는 경상도 방언) 잠이 오지 않아 책을 펴는데 하필이면 '곧 죽어야 하는 어떤 사람'에 관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지나간 한 때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라는 것도 그때서야 알게 된다. 왕이 심히 감사함으로 드디어 이 사람의 생명을 구해줌과 동시에 몰살의 위기에 처해 있던 그의 민족까지 위기를 벗어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해준다.
하필 그날 밤 왕은 왜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하필 왜 책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하다못해 온갖 산해진미 안주가 있고 좋은 술이란 술은 가득 쌓여있는 궁중이지 않는가. 그리고 잡은 책이 하필 그 책이며 또한 책을 펼쳤는데 공교롭게도 '죽게 된 사람'이 자기를 구해 준 바로 그 내용이 모두 적힌 페이지였을까.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사람들은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때에 우연은 있을 수 없다.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모든 것이 짜 맞춘 듯 완벽하다.
한낮의 열기 속으로 한바탕 폭우가 쏟아졌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마당가 세워둔 차 아래에 더운 햇볕을 피해 들어가 있던 한 마리 고양이는 바닥으로 빗물이 점점 밀려 들어오자 자꾸만 안쪽으로 몸을 피했다. 줄곧 30여분을 따르던 비가 잦아들면서 반짝 해가 나기 시작했다.
낮게 내려왔던 비구름들이 한꺼번에 모든 비를 쏟아 붓고는 제할 일 다했다는 듯이 하늘을 향해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안개구름은 양털같이 새하얗고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들은 서로서로 손을 잡고 다 함께 춤추며 하늘 높은 곳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공기가 한결 시원해졌다. 내린 비로 깨끗하게 씻겨진 공기는 더욱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더위를 이기게 해주시는 하나님.
옥상에 올라가 구름이 아직 걸려있는 산자락을 향해 캐논 미러리스를 눌렀다. 600밀리 대구경 탐론 렌즈를 장착했다. 하얀 양털 안개구름이 초록빛 산자락을 배경으로 카메라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멋진 풍경에 마음이 들뜬다. 가족톡에 올려서 가족들한테도 보여 주어야겠다
평범한 일상과 더불어 이 모든 것이 한순간도 가만히 계시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이 '때를 맞춰 베푸시는 선물'이다.
감사합니다.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