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은행창구에서 벌어진 일

어떤 할머니 - 2부

by 장현수

병수씨가 현재 이 지점으로 내려오기 전에는 본부 기획실에 근무했었다. 거기서 조직전체의 전략을 재편하거나 신사업 발굴 업무를 담당했다. 능력 있는 직원들 모두가 조직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일하는 모습들이 참 아름다웠다. 본인 스스로도 이 조직 공동체 일원으로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건강에 대한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하게 하는 건강 검진에서 해마다 특정 부위의 수치가 계속 악화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의사는 스트레스가 주원인이라는 처방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조직의 특성상 주말 휴식마저 자유롭지 않을 정도로 도무지 일만 하고 살았던 듯싶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조직의 핵심 부서라서 때가 되면 바라는 승진은 자동보장이었다.

조직 내에서 촉망받고 일을 잘해 나가던 병수씨의 대학선배 한 명이 있었다. 승진도 빨랐고 조직의 핵심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암진단을 받고서도 수술을 미루며 책임감 있게 일을 진행해 나갔다. 그러다가 시기를 놓쳐 급기야는 암세포가 전이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가족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젊은 나이로 결국 눈을 감았다. 이로 인해 더 큰 깨달음이 왔다. 잘 나가면 뭐 하고 승진하면 뭐 하나 내 몸 하나 아프면 다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을. 아내와 딸과 아들의 모습이 떠 올랐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다. 주변에 자문을 구했다. 대부분 현 부서에 그대로 머무는 것을 조언했다. 누구든 오고 싶어 하고 바라는 부서를 왜 그만두느냐였다. 몇 년 뒤 승진하면 그때 나가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다.


병수씨가 지방에 근무할 때였다. 6월이었다. 한 여직원이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이름과 발음이 비슷해서 "신경 쓰인다"는 말로 가끔 장난까지 치기도 했던 여직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여직원이 갑자기 사표를 냈다. 조직에서 통상적으로 12월이 되면 명예퇴직 신청을 받는다. 그러면 일반퇴직 할 때보다 몇 년치 퇴직금을 더 얹어 준다. 옆에서 병수씨를 포함해서 여직원 후배를 아끼는 마음에 많은 이들이 만류했다. 하다못해 12월 명예퇴직이라도 권했다. 그러나 여직원의 태도에는 외견상 흔들림이 없었다. 병수씨가 보기에도 안타까웠다. 몇 개월 남지 않은 12월까지 버티면 최소한 일 억 원 이상은 더 받아갈 수 있겠는데도 말이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혼이 그렇게도 좋은가 하고 의아해했을 뿐이다.


병수씨가 이 직장 이 조직에서 이 여직원처럼 드디어 남들이 아무리 말린다 해도 결정을 번복할 마음이 조금도 생기지 않는 "그" 때를 자신도 이제 맞이하게 된 것 같았다. 인생에 있어서 부서의 파워가 또한 승진이 아무리 좋다 한들 내 삶, 내 인생마저 걸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를 떠나가겠다고 마음먹고 난 후 앞으로의 삶을 새롭게 그리는 순간 그때 그 여직원의 마음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억만금을 준다 해도 내가 싫은 것은 그냥 싫은 것이고 두 번 다시 되돌아볼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돈이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여직원이 결혼이 좋아서라기보다 결혼을 빌미로 삼아서라도 퇴직을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해야 하는 퇴직이 그 여직원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근무하는 것은 한마디로 "듣정 없는 것"(경상도 말)이었다.


남들은 대부분 혹은 많은 사람들이 영업점 근무는 거의 원하지 않는다. 카드도 해야 하고 예금도 대출도 해야 한다. 보험 추진은 더 어렵다. 그래서 보험은 주로 실적을 위해 자기 비용으로 엄마 아버지와 주위 가까운 형제 친척들로 "끊어 넣기"(은행 은어)를 자주 하게 된다. 개인이 의무적으로 추진해야 할 지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는 불려 가 대책보고까지 해야 한다. 사람 몬 산다(경상도 말). 이렇게 고객들에게 금융 상품을 소개하고 가입하게 하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병수씨가 본부조직과 전혀 성격이 다른 업무를 하게 되는 영업점 근무는 것은 다소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하마터면 이 직장생활의 내리막 길이 되어 급기야는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 영업점 근무에서도 길이 없으란 법은 없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걱정을 덜게 되는 것은 영업점 근무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부부서 발령받아 오기 전에 영업점 근무를 해 본 적이 있었다.


원하는 영업본부를 물색하고 다가오는 정기 인사철에 이동발령 여부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병수씨는 곧바로 조직 인사파트 담당자를 찾아갔다. 본부부서 조직 슬림화에 고심 중이던 인사담당자에게는 병수씨의 이 부탁이 그들 부서 업무로 봐서는 손 안 대고 코푸는 하찮은 일임에 틀림없었을 것일지도 모른다. 나름대로 병수씨는 본인의 영업점 근무 경력과 본부부서 근무 경력이 합쳐져 영업점 다시 내려가면 균형 있게 더 일을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섰다.


이러한 이유로 병수씨가 이 영업점으로 발령을 받아 온 것이었다. 발령받고 온 이후 영업점에서는 직원들끼리 쉬쉬하면서 병수씨에 대한 말을 은연중 서로 나누고 있었다. 왜 본부 좋은 부서 놔두고 영업점 내려왔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면서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병수씨가 본부에서 싸워서 밀려 내려온 줄로 이해하고 있었다. 병수씨는 이런 분위기임에도 무엇보다 직원들과의 좋은 관계성을 유지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직원들의 손과 발이 되어 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한 지도 벌써 3개월 여가 지났다. 그리고 갑자기 이 일이 터진 것이었다.


병수씨는 사고 당사자 창구 직원을 대신해 팀장인 본인이 지방도시 ㅇㅇ로 내려가 그분을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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