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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Jan 12. 2024

나의 답사 도반

선과 임병기 형 삶에 대하여




보편적 지식도 중요하지만, 살면서 몸소 체득하여 얻은 지혜로써 인생 황혼의 삶을 풍성하게 살아가는 노년이 멋있다.


시골 농부나 건설 현장 노동자의 갈라진 손바닥에서, 우연히 길에서 만난 할머니 한숨 속에서 더 소중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보다 스승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게 행복한 리듬을 타고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스승이 넷이나 있다. 더 많을 수도 있겠지만, 구태여 4강으로 구성하면 그렇다는 뜻이다. 더 할 것도 없이 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교수를 지내다 몇 해 전에 퇴임한 송찬섭 선생님을 가장 먼저 꼽는다. 창고에 먼지만 가득 쌓여가던 역사의 현장과 문화재 답사 원고를 대번에 알아봐 주시고, 출판사를 소개해 세상에 얼굴을 내밀게 하였다.

방송대학TV에 출연하게 하는가 하면, 직접 ‘역사의 현장’ 과목 집필과 동시에 강의를 맡겨 새로운 경험을 쌓게 해준 일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다. 잔잔한 음성, 따뜻하게만 다가오는 눈매와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은 미소는 폭력이 동반된 자라고 해도 순식간에 무장해제 시키는 마력이 있다.


다음이 고등학교 일 학년 시절 홍O선 선생님이 있다. 선생님은 고1 때 담임이자 수학 담당 교사였다. 수학에 젬병인 터라 시험시간 답안지에 해답 대신 장문의 글을 남겼다. '미술대학을 희망하는 나는 수학보다 미술 실기에 더 매진해야 한다며, 저의 순수한 꿈을 무지막지하게 매로 다스리지 말라'고 적어서 제출하였다. 다음날 매 맞을 각오 하고 등교하였다. 그러나 네 놈은 미술대학보다 국문과에 가야 한다며 응원하던 선생님, 이죽이죽 잇몸을 드러내며 웃던 모습이 유난히 그립다.


그리고 도보여행가 안승영 선생이며, 마지막으로 2002년부터 역사의 현장과 문화재 답사를 다니면서 내게 문화재를 보는 안목을 키워준 임병기 형이다. 인터넷에서 닉을 별로 맛없는 과자 이름과 같은 '선과'라 하더라만...^^*..




지금부터 미친 듯 전국 돌며 역마살을 즐기는 임병기 형에 대해 말하려 한다. 경북 성주가 고향인 그는 필자보다 세 살이 많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다음(Daum) 인터넷카페 《아름다운 오류》에서다. 문학카페에 우연히 발을 디딘 나는 그곳에서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이라는 장문의 문패를 단 방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 자신이 발품 팔아 다녔던 역사의 현장 기록을 접할 수 있었다. 집성촌, 불교 문화재, 궁궐, 고택 등 다양한 방면을 재밌게 엮어서 풀어 놓은 답사기였다. 역사와 문화재에 호기심이 많았던 터라 금방 빠져들었고, 시간이 나면 그곳에 늘려 있는 자료를 찾아 읽곤 했다.


그리고 그가 나와 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생면부지 우리는 처음으로 답사를 함께 할 기회가 생겼다. 내게는 진정 가슴 뛰는 날이었다. 2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기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2002년 늦가을, 노란 은행잎이 작은 바람에도 흩날리던 날이었다. 겨울을 재촉하려는 듯 비가 오락가락, 하늘은 아침상을 물리친 시어머니 낯짝처럼 거무튀튀하게 내려앉았다. 우리는 추위를 뚫고 대구 옥포 용연사, 남평문씨 세거지, 도동서원을 둘러보았고, 그의 지식을 내 것인 양 흡수하였다.


인연은 그런 것, 첫 구슬을 잘 꿰었으니 다음부터는 주말 행사처럼 변해갔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역사의 현장과 문화재를 찾았고, 주로 나는 그의 지식을 빼앗아 먹는 형식이었다. 그 사이에 필자보다 몇 살 아래 유현이라는 호를 쓰는 아우님을 알게 되었다. 우리 셋은 날을 넘기면서 답사지와 역사의 현장에서 즐거움을 만끽하게 된다. 잡다한 잡학사전 같은 임병기 형은 역사와 민속, 풍수와 사찰, 석탑과 불상까지 두루 섭렵한 말 그대로 재야의 고수다.


그리고 유현 아우는 동양철학을 전공한 인재다웠다. 불교문화를 비롯해 종교와 세계사까지 문화사를 통달해 지식이 끊이질 않아 속칭 ‘거미똥구멍’이란 별호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다. 장돌뱅이 필자야 역사는 물론 문화재 지식이 일천한 터라 미적(美的) 접근이 가장 쉬웠던 까닭이다. 따라서 계절과 날씨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불상과 석탑, 그리고 초가와 고택들을 한 폭의 작품으로 바라보며 즐기는 것에 만족하였을 뿐이다. 답사와 관련해서는 지면상 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임병기 형은 1970년대 중·후반 대학 때부터 답사를 다녔으니 답사 공력이야 대한민국 문화답사 1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졸업 후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대기업에 입사해서 한 직장에서 퇴직하게 되었으니, 그의 성실성이야 꾸미지 않는 본질을 떠올리게 한다. 서울 유수의 명문대를 졸업한 입사 동기들과 승급 경쟁을 포기하면서 공존이 가능해졌고, 틈틈이 역맛살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최고를 포기하자 그 스스로 작품이 되어갔던 것이다.


마애탑 임병기 저 '마애부도 마애탑'에 삽입된 사진을 참고해 펜화 작업

그리고 최근에 임병기 형이 한 권의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그의 사전에 책을 낼 계획이 없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평소 입버릇처럼 그냥 즐기면 그만이라는 그의 답사 철학에 미루어 한 권의 책이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기까지 주변의 입김이 큰 몫을 했을 것이리라. 그런데 하필이면 책 표제가 《마애부도·마애탑》일까? 부재를 보면 ‘윤회(輪廻), 그리고 피안(彼岸)의 세상을 꿈꾸다’이다. 이 책은 답사라는 낱말이 대중화되기 이전부터 우리 문화재가 그냥 좋아 민속 문화에서 시작해 방방곡곡을 헤맨 흔적의 조각이다. 출판사 책 소개말을 인용한다.


-저자는 자신의 일기장을 공개하듯 그동안 써놓은 6천여 편의 답사기 중 일부 주제를 택해 세상에 내놓는 첫 조각이다. 지금까지 동일 주제로 발간된 적이 없는 우리나라 ‘마애부도와 마애탑’만을 모아서 엮었다. 전국 산천을 찾아다녔던 답사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고비도 넘겼고, 무려 여섯 번 발길 한 후에야 확인할 수 있었던 부도(浮屠)도 있었다. 전국에 분포한 마애부도의 특징, 양식, 명칭, 주인의 신분, 조성 시기, 분사리(分舍利), 문화재 지정 여부 등의 현황을 집계하였다. 그리고 서울,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경북, 부산, 울산, 경남 순으로 지역에 분포한 마애부도와 마애탑을 구체적으로 펼쳐놓았다.-



6천여 편의 답사기라니? 그리고 여섯 번이나 한 곳을 찾는 그의 악착같음, 나는 이 대목에서 혀를 내둘렀다. 이미 시중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을 비롯해 답사기와 여행기, 문화재와 역사의 현장 등과 관련하여 고만고만한 책들이 엄청나게 많이 출간되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아무도 다룬 적이 없는, 그러면서 문화재 답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좋아할 마애부도와 마애탑만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던 것이다.


임병기 형을 좋아하는 이유가 또 있다. 그는 우리 것이라면 편식하지 않는다. 종교의 유무를 떠나 역사적 접근과 사연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남다른 애정으로 오랜 세월 우리네 옛것을 찾아다니면서 역사의 현장, 석탑, 불상, 사찰, 폐사지, 집성촌, 고택, 누정, 서원, 향교, 궁궐, 성당, 교회 등 편식하지 않고 보고, 느끼고, 알아가고, 즐기면서 지난 사연에 자신을 대입해 살아왔다. 참 남다른 애정이다.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아무나 할 수 없는, 그야말로 답사란 혼령이나 신이 있다면 아마도 그와 함께 장단을 맞추고 있을 법하다.


나는 그가 여전히 부럽고 또 존경스럽다. 자투리 시간만 나도 훌쩍 떠나 옛것과의 대화를 나누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돌로 조각된 무던한 석탑도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저물녘, 석탑을 등지고 휘적휘적 걸어오는 그의 실루엣이 이처럼 멋져 보인다. 마치 석탑과 하나의 띠처럼 어울리는 그를 보며 나도 석탑이 된다.


결국 답사란 나를 찾는 여행이자, 내 삶의 보약과도 같은 시간을 선사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지혜롭고, 착하게 살기 위함이며, 역사에서 나를 보고, 선현들로부터 사숙(私淑)하고, 그러다 보면 내가 불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석탑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불상과 석탑이 나를 보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인생 후반기 청춘에 묻혔던 꿈을 야금야금 살려 환갑 진갑 다 지난,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지금을 즐기는 그가 참 멋지지 않는가! 진정 ‘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종심從心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는 그다. 지금은 어느 산골짝, 어느 강가에서 우리의 옛것과 대화하고 있을까.


인생의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 그 자체를 즐김으로써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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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추억의 편린 낱장의 행복'에 삽입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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