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게으름은 아버지로부터다
책이 사라졌다. 작업실 책상 책꽂이에 있던 해외 여행기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따끈한 신간, 혈기 왕성한 저자 친필 사인까지 들어간 책이 증발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읽으려고 딴에는 중히 여겼다. 공용작업실에 들어서는 순간 책이 제 발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기대하곤 하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집에서 재차 뒤졌다. 아무리 들추어도 나오지 않는다. 뭉싯거리며 마음에 먹구름이 차오려는 순간이었다. 책꽂이에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일순간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손길을 기다리는 책들이 시선을 붙들어 맸던 것이다. 책갈피 한 번 넘기지 않은 책, 맛보기로 몇 장 넘기다 만 책들이 먼지를 덮어쓴 채 침묵의 조소를 뱉어내고 있었다. 홀린 듯 책을 흔들어 깨웠다.
이리저리 날리는 먼지 속 표정들이 심상찮다. 대지에서 탯줄도 자르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 그리스인 조르바가 퇴물 취급하냐고 노려본다. 이태준의 문장강화가 그러니 네 문장이 그따위라고 비웃는다. 활주로에 웅크리고 앉은 생텍쥐페리 야간비행은 언제일지 모르는 출발을 기다리고, 인문학의 패배자는 너라며 고전불패가 일갈한다. 알랭 드 보통까지 너의 문학적 가치는 향락을 위한 허세라며 비웃는다. 장자는 비우라고 하지 않고 아예 포기하라며 물구나무를 선 채 독설을 퍼붓는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도 책을 욕심만 낸다는 것은 유희일 뿐이라고 빛바랜 몸으로 동참한다. 이들 아래 짓눌린 유시민이 앞니를 드러내며 내 필법에 공감하라며 대놓고 염장을 지른다.
없어진 책이 문제가 아니었다. 패배자의 편린을 보자 감정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가슴에 활자화된 문학의 향기가 스며들자 콩닥 뛰었다. 설 연휴 동안 하루 열 시간을 눈이 쑥 들어가도록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권에 만족해야 했다. 책의 수준이 높아 메모하며 읽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책 속의 또 다른 책이 자극했다. 마음을 낚아챈 그들 책이 내게 없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건드렸다. 도사리고 있던 마음속 지적 허영이 서점으로 내몰았다.
끓기 시작한 열정은 출구 없는 발산을 향해 무작정 나아갔다. 데이비드 소로 ‘윌든․시민불복종’, 볼테르 ‘캉디드 혹은 낭만주의자’, 칼 세이건 ‘코스모스’, 헨릭 입센 ‘페르 귄트’, 마루야마 겐지 ‘모독의 무지개여’ 등등 격렬하게 부추긴 책 몇 권을 골랐다.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겉치레뿐인 존재를 그럴싸하게 충족시키는 방법이 아닐까 했다. 허영을 실어 나르며 책 속으로 숨어들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인지도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포개진 책을 바라보는 아들의 웃음 섞인 낯빛, 힐긋힐긋 곁눈질하는 아내의 표정에 냉소가 스몄다. 따위의 표정을 이겨내려면 생활 습관부터 바꿔야 했다. 해가 떨어지면 놋그릇에 담긴 막걸리를 탐미하던 시간을 포기했다. 꿀맛 같은 새벽잠도 반납하며 사투를 벌였다. 금방이라도 순금 덩어리를 캘 듯 눈이 따갑도록 막장 같은 책장을 파헤쳤다. 제법 깊숙하게 파고들던 순간이었다. 문득 ‘이게 뭐 하는 짓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왜 책을 읽어야 하나?’로 자문자답이 시작되었다.
독서는 배움이다. 왜 배우려는가?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무엇인가? 그릇됨의 뉘우침이다.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워하고 뉘우치고 고쳐가면서 최대한 인간답게 살기 위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일찍이 공자가 말했다. 경험이 아니라 선험적 지식으로 정리한 까닭에 새롭게 해석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자신의 언어로 사고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타인의 언어가 내 생각인 양 착각에 빠질 수 있다. 긍정적 사고를 정착하고, 자조하지 않는 삶을 꾸려가려면 책에서라도 익혀야 고이지 않고 흐르는 자가 된다는 결론에 닿았다. 내 속에 변화의 날개가 돋쳤다.
조선의 석학 다산 선생을 떠올렸다. 절대고독의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글공부는 아비 버릇을 이을 줄 모르고 주량만 아비를 넘느냐며 꾸짖는다. 선생의 다그침이 잊고 있던 아버지를 생각나게 했다. 고백건대 부족하나마 글을 쓰게 된 계기도 아버지로부터였다. 석고 데생 하는 아들을 보며 서양귀신만 그린다고 나무라던 아버지였다. 그러면서 어린 아들의 감수성을 엿보았을까. 마음을 다스리려면 그림보다 글짓기가 더 좋을 거라고 했다. 붓을 던지고 이나마 글로 밥줄을 연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버지 말씀이 유전자처럼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기억 속 아버지는 늘 글과 살았다. 가업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서책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이곳저곳 글을 팔고 글씨를 팔러 다니기도 했다. 어머니는 한 치 의심도 없이 조선의 마지막 양반이 당신 남편이라고 믿었다. 가장으로서의 무능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아버지를 대신해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 저잣거리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눈초리를 치켜세워 목청을 돋우고 싶은 날이 왜 없었을까. 그러나 어머니는 평생을 헌신하다 눈을 감았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는 절박한 현실을 눈감기 위해 글을 움켜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써놓은 글을 펼쳤다. 내시 이 앓는 소리처럼 맥없이 흥얼거리며 주저리주저리 군소리뿐이다. 붉을 줄을 죽죽 긋는다. 펜 끝이 마음에 상처를 내며 가차 없이 지나간다. 붉은 줄이 얼기설기 뒤엉킬수록 거미줄 같은 설익은 문장이 걸려든다. 버둥거려 보았으나 손발이 꽁꽁 묶인다. 먹물로 글을 덮어버리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겉만 화려한 쭉정이에 불과했다. 더 여물어야 한다. 글 주위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아비처럼 살아서도 안 된다는 회한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린다. 사늘한 밤공기 속으로 나왔다. 아버지가 밤그림자가 되어 함께 걷는다. 오감이 별처럼 살아난다. 감각을 꼬집는 이슥한 밤에는 술 한 잔이 제격이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