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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Jun 15. 2024

도루메기집

60년을 한결같이......


                                           

매일 출근하는 것도 모자라 마수걸이 경쟁하는 충성도 높은 고객들……. 도무지 알 수 없는 도루묵 맛처럼, 매력이라곤 왼쪽 콧구멍 아래 좁쌀만 한 까만 점뿐인 주모. 바빠도 불만, 잠시라도 한산하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빈 의자 수만큼 한숨으로 채운다. 그런데도 하루건너 곗날이자 장날이다. 왁자그르르 오가는 인사에 놋그릇 술잔이 날아다닌다.      


하필이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행색의 도루묵일까. 생선이라곤 하지만 살이 토실토실 오른 것도 아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내장과 대가리를 빼면 입으로 들어갈 몫은 별로 없다. 해작거리다 보면 살점이 낱낱이 떨어져 빈 젓가락만 빨아 서러울 때도 있다. 겨울 초입, 어쩌다 배때기가 볼록 튀어나온 알배기가 걸리는 날이면 마치 횡재수한 기분이지만, 그래 봐야 겨울철 중에서도 한 달 남짓, 일 년 사계절 알배기가 없는 이상 어물전 꼴뚜기와 그놈이 그놈이다. 정말 그럴까? 진정 속내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질량은 넓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열 명 남짓 앉으면 꽉 들어차는 공간, 콤콤하게 익어가는 도루묵 냄새가 술통의 막걸리 향과 뒤섞여 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을 빌어 먼지를 헤집는다. 누렇게 뜬 벽지 사이, 줄지어 걸린 액자 속 사진들이 네놈 솜병아리 시절부터 막걸리를 팔던 곳이라고 일갈한다. 용기가 가상했던 것일까. 


조선시대 전서체의 대가 미수眉叟 허목許穆 선생도 보인다. 선생이 해일을 일으키는 귀신을 물리치기 위해 삼척에 세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망망대해에서 태어난 도루묵을 따라와 술통 앞에 붙었다. 술에 스며드는 잡귀를 물리치는 것은 물론, 바쁜 주모를 대신해 술통에 파도를 일으키며 도깨비뜨물을 퍼가는 이들을 감시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초라한 행색의 서러움은 솥뚜껑에 내장을 들어내며 익어가는 도루묵뿐만 아니다. 포대화상을 닮은 노름꾼의 젊은 날의 치기는 한낱 일장춘몽, 탈탈 먼지만 날리는 작금의 주머니 사정은 볏술을 사정하는 나락을 맛보고 있다. 하루 품삯을 받지 못해 화를 삭이며 뼈째 도루묵을 씹는 막노동꾼의 눈은 동해의 성난 파도 같지만, 서러움의 포말도 보인다. 술과 요기를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해 막걸리 한 잔에 무려 두 마리씩 공짜를 강요하는 민대가리의 너덜너덜한 풍취는 가히 혼자 보기 아깝다. 


신용이 바닥나 한 잔씩 마실 때마다 현찰을 내야 하는 똥항아리는 빈 놋그릇을 땡땡! 치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한다. 이처럼 서러움을 겪으면서도 잊지 않고 찾아오는 비밀은 뭘까. 우러러 부모를 섬기거나 굽어 처자를 위해 애쓰지 않았음에도 이태백의 정취만 따라 하려 하니 애처롭기 짝이 없지만,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속내의 서러움은 스스로 도루묵이다.     


노쇠한 몸으로 가족의 울타리를 안간힘으로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래선지 늘 투덜투덜 불만투성이다. 이보다 사정이 좀 더 나은 퇴직한 은행가도 있다. 인생의 후반기를 종교 교리에 빠져 뒤늦은 득도(?)의 경지를 막걸리에 도루묵을 벗 삼아 향유하고 있다. 50대 중반 사회에서 내쳐진 후, 10년 강산을 훌쩍 뛰어넘어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단골도 있다. 꿈과 휴식이 포개진 우아한 결핍을 즐기며 뭇 사람의 착각으로부터 부러움을 사는데,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오면 검고 두툼한 비닐봉지를 들고 석양에 맞서 휘적휘적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뎃잠을 잘지언정 한 달에 한 번 격조 있게 술을 마시기 위해 억센 막노동도 마다치 않는 위인도 있다. 어느 날부터 여자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늑대 한 마리가 도루묵이집 주위를 어슬렁거리곤 한다. 광낸 구두만큼이나 뺀질뺀질한 춤꾼, 온종일 저 혼자 있어도 시끄러운 떠버리, 고드름장아찌 같은 전직 세무쟁이, 이 모두가 있으면 거슬리고, 없으면 허전한 인사들이다. 환쟁이, 산쟁이, 신문기자, 교수, 향교 학동, 딴따라는 덤이다.      




어쩌다 주워들은 말로 비분강개하며 오류투성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부류도 있다. 마음은 음탕한 소굴에 두고 세 치 혀로 요리조리 뒤집어 희롱하는 인간에게 비하면 차라리 낫다. 술이 술을 마실 때쯤 인간의 머리를 징검다리 삼아 맞은편까지 건너뛰는 것은 예사다. IS를 섬멸하고, 일본으로 이어져 아베의 목을 치고, 북한을 응징하면서 절정에 오른다. 그러다 술이 인간을 지배할 즈음에는 애국의 기치 아래 본적도 만져본 일도 없는 민족이란 이름으로 색깔에 대한 약탈 본색을 드러내기도 한다. 탁자 위 앙상한 슬픔의 뼈를 드러낸 채 아가리를 벌려 실소하는 도루묵은 안중에도 없다.      


파도가 몰아치는 날이면 바다 깊은 곳으로 숨는 다른 물고기와 달리, 수면으로 뛰어올라 파도를 타는 도루묵처럼 2500년 세월도 거침없이 거스른다. 복잡다단한 희망을 치열하게 고뇌해 선험적이고 형이상학적 이상을 세련된 논리로 제시한 붓다와 소크라테스, 공자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이들 일생의 왜곡은 그나마 양반에 속한다. 의도치 않게 억울한 이도 있다. 대화 도중 얼굴만 잠깐 비추다 사라지는 관세음보살과 최제우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카메오다.      


서툰 장인 잔칫날도 있다. 은근히 짧은 터수를 자랑하던 품새가 나날이 진화한다. 기타를 비롯해 우쿨렐레, 오카리나, 팬플루트 연주라도 펼치면 술렁이던 객석은 물론 술잔이 침묵하고, 사람들 가슴 속 먼 기억을 헤집는다. 때론 장구를 곁들인 가락이라도 늘어지는 날이면 도루묵 살점이 낱알로 떨어져 들썩이고, 놋그릇의 막걸리가 일렁이며 춤춘다. 공연이 끝나면 문득 고독이 술을 따르는데, 긴 여운은 새롭게 목을 축여도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쏟아낸 말의 파편들이 술에 뒤섞여 이리저리 허공에서 비틀거리다 별 무게를 얻지 못하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안팎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대화에 폭소를 자아내는가 하면, 어둠이 찾아와 길게 늘어진 그림자처럼 슬픈 여운을 남긴다. 그러다 마치 절제의 미학을 실천하듯 붉그데데 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둥지로 향하는 뒷모습에 세월의 단호함이 걸망처럼 걸려 흔들린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서릿바람이 휘감는 삶은 언제 어느 때 길고도 긴 겨울잠에 들지 모르는 처지지만, 험한 날을 택해 힘찬 꼬리 짓으로 수면에서 알을 낳는 도루묵의 용기를 품고 있다. 씨알에 비해 낱알이 큰 까닭인지도 모를 일이다.     




‘도루묵집’, 반백 년이 훌쩍 넘도록 도루묵과 놋그릇에 철철 넘치는 막걸리로 지켜낸 세월이다. 대대로 이어온 한민족의 빛, 노르스름한 놋그릇에 담긴 신비의 비밀과 용감한 도루묵의 기상을 알려고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래도 그 혜택은 톡톡히 누리고 있으니 은혜라면 이 집 이마에 붙어서 슬픈 듯 아닌 듯, 잔잔한 미소로 내려다보고 있는 시어머니 덕이다.      


도루묵의 전설은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그 옛날 전란을 틈타 은어銀魚로 팔자가 수직상승하는가 싶더니 “도로 묵어로 부르라!”던 어리바리한 임금님께 받은 ‘말짱 도루묵’ 충격의 서러움은 이 집으로 인해 어느 정도 보상이 된 셈이니 말이다.      


아서라! 어물전 꼴뚜기는 면했더냐? 


    


* 1961년에 문을 연 '도루메기 막걸리집'이지만, 이제 도루메기(도루묵) 맛을 볼 수 없다. 해수면 온도가 변하면서 동해에서 그처럼 흔하게 잡히던 도루묵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궁여지책으로 요즘에는 황민어나, 고등어, 양미리 구이로 대신하고 있다. 우리처럼 40여 년 넘도록 충성도 높은 단골은 허전함을 감출 수없다. 


적당한 안주가 없으면 이집 주인 아주머니와 흥정만 잘하면 저렴한 가격에 두부찌개도 맛볼 수 있다. 이 또한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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