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르페모리
아버지를 닮아간다. 피곤한 저녁이나 술 마신 다음 날 아침이면 거울 속에서 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게슴츠레한 눈, 머리카락은 물론 터럭까지 점령해버린 서리, 속살이 보이는 정수리를 바라보다 부질없이 하세월을 보낸 과거가 떠올라 몸서리친다.
천장이 꺼질 듯 반복되는 한탄의 나날들에 스스로도 질렸다.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음에도, 이보다 더 나쁜 일 없어서 다행이라고 찬탄한 세월이 그야말로 쪽팔리기 짝이 없다. 불행했던 과거뿐이건만 꿈에서조차 어르고 달래는 한심한 인간을 보면서 이젠 위로하기도 지쳤다.
믿음이 없는 자는 자유롭거나 혹은 외롭다. 자유는 고정된 생각의 빗장을 활짝 열어야 가능한 법, 불행하게도 외로움을 이기지 못했다. 이보다 스스로 연약함을 드러낸 행위가 또 있을까. 돌이켜보면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하지 않은 일들을 경험하면서 종교에 기웃대고 신에게 빌붙어 뭔가를 얻으려 했다.
삶은 그냥 살아가는 것이지 완전히 이해하려거나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는 데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다. 단언컨대 신은 인간의 가슴팍이나 등짝에 매달리거나 빌붙어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 따위의 신에 의탁해 안위를 찾고 넌지시 복을 빌었던 지난날을 비웃는다. 설사 사후세계, 천당이나 극락이 존재하더라도 어차피 떨어질 곳은 지옥일진대 앞서 걱정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현생자유를 위한 필사적 필연적 선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묵직한 과제가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힌다. 범부인 탓에 미움을 사랑으로 승화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가슴에 얼기설기 쌓아놓은 갈등과 분노와 잠재적 폭력의 얼개들을 삭혀야 하는 일은 도전해볼 만하다. 각질 벗겨질 듯한 피부, 골이 깊어진 얼굴을 하고서 하등 의미 없다고 해도, 지금이 그때라 자위한다. 얼마가 남았던 지금처럼 의미 없는 밤이 이어질 것이고, 존재 가치를 잃은 채 구석을 찾아 뒹구는 낙엽처럼 시시껄렁한 날들이 남은 정력을 앗아가더라도 내 삶에 시시때때 표출되던 증오를 감추리라.
시나브로 나이가 들면서 꽃이란 놈은 안개 속에서 피어나기 시작했고, 어느 날부터 귀에서는 징 소리, 갈대 스치는 바람 소리, 쇳소리 섞인 노랫가락 울리는데, 조락을 앞둔 삶에서 필사적 발버둥은 그 의미를 잃었다. 더불어 오감도 다투어 둔화되어 가는데, 행운만 따라준다면 청춘의 가면 벗어던진 본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자석에 딸려가더라도 나만의 춤사위를 잊지 않으리. 그리운 것 대부분 세상에 없으니 애절할 일 없고, 봄날에 피는 꽃보다 가을 낙엽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세월에 에너지가 고갈되면서 시작된 것이리라.
고백건대 살아갈 용기는커녕 단박에 죽을 용기도 없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여전히 아이들 새된 소리에 귀가 열리고, 황혼의 황홀함에도 넋을 놓고, 커피숍 구석에 걸린 진주귀걸이 소녀 눈망울에 눈길을 빼앗기는 싸구려 감성이 들숨날숨을 위로한다. 이는 아주 천천히 자살을 선택하듯 길고 가늘게 살아가기 위한 자성 능력이다.
서산머리 붉은 해가 걸려 들녘에 불을 지른다. 황홀한 노을 바라보며 문득 갈 때를 떠올린다. 남은 소원 한 줄 있다면, 허세 부리듯 헛기침 날리는 일 없이, 간혹 실수로 포장한 여유나 부렸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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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페모리Carpemori
“인생을 즐겨라! 후회 없이…. 그러나 너의 죽음은 기억하라.”
단언컨대 염세厭世란 지옥이자, 한바탕 죽음의 굿판을 벌이자는 악마의 유혹이다.
언젠가는 죽을 운명이라고 해도 포기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살려고 태어났지 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마지막 그날까지 악착같이 살아갈 거라 어금니를 문다.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자석에 끌려가듯 어차피 죽을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의 죽음을 기억하자.
삶 앞에서 겸손해지려면.
‘Carpe diem’, ‘Memento m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