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필우입니다 Nov 21. 2024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 정약용

늙음을 두려워마라

* 다산 선생 묘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 정약용


‘卿當用卿法 迂哉議者誰 區區格與律 遠人何得知 (중략) 梨橘各殊味 嗜好唯其宜’

-누구나 자기의 법을 쓰는 것인데, 오활하다 비난할 자 그 누구리오. 구구한 시격과 시율을 먼 사람이 어찌 알 수 있으랴.(중략) 배와 귤은 맛이 각각 다르니, 오직 자신의 기호에 맞출 뿐이라오.-     


다산 정약용 선생.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년)의 시집 《송파수작(松坡酬酢)》에 수록된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다. 이 시는 1수에서 6수까지 이어지는데, 해남 강진에서 18년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 마전마을, 지금의 남양주 조안면으로 돌아와 71세 때에 쓴 글이다. 스스로 늙음에 대해 겸허하고 때론 유쾌하게 받아들이면서 생에 달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8년이라는 혹독한 고독 속에 유배를 경험해야 했던 선생으로서 늙음을 대하는 반전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조선후기 지배층은 성리학적 지배이데올로기의 관념론을 앞세웠지만, 문벌과 파벌 등 붕당으로 갈라진 혼탁한 세상이었다.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대북, 소북, 청남, 탁남, 노론벽파, 남인시파 등 붕당을 지어 목숨을 걸고 대립하였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 선생은 자신의 학문과 정신세계를 의연히 지켜내며 진취적이고,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상시분속(傷時憤俗)’ 즉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적인 일에 분개할 마음이 없다면 시를 지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조선 22대 왕 정조 7년(1783) 22세의 정약용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으로 들어온다. 28세에 대과에 합격하여 자신보다 10살 연상인 정조를 가까이서 모시게 된다.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믿음은 남달랐으며, 다산 또한 믿음을 한 번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정조의 총애아래 승승장구하였으나, 노론벽파의 끊임없는 견제와 음모에 늘 시달려야 했다. 그때마다 정조는 한직으로 잠시 물러나 있게 하거나, 직접 그를 대변해 정적들로부터 예봉을 비켜가게 해주었다. 


그러나 1800년에 정조 대왕이 졸지에 승하하면서 정약용은 폐족의 나락을 맛보아야 했다. 11살이던 순조가 즉위하자, 순정대비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노론벽파들이 전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남인 시파의 핵심이었던 정약용을 그냥 둘리 없었다. 1801년(순조1년) 신유사옥을 일으키며 ‘사학금지교서’를 내려 사학의 씨를 말리기 시작했다. 기실 말이야 사학처벌이었지만, 한 때 서학을 접했던 정약용과 남인시파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였다. 결국 재능은 뛰어났으나 닫힌 시대, 당쟁의 혼탁한 시류에 인재들은 아까운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조선 최초의 영세천주교도 다산의 매형 이승훈이 처형당했으며, 다산의 셋째형 약종은 진실한 신앙으로 떳떳이 죽음으로써 순교했으며, 그의 아들 철상, 하상, 딸 정혜도 천주교로 인해 요절하였다. 이처럼 정조가 없는 세상의 다산은 자신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 노론벽파들의 음모를 피해갈 수 없었다. 


정약용 형 정약전은 우의도(흑산도로 옮김)로, 다산 선생은 전라도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당대의 부조리를 통찰해 목민관의 바이블 《목민심서》등 5백여 권이 넘는 책을 저술해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만권의 책으로 탑을 쌓고 살았으며, 혜장선사와의 인연으로 혜장의 제자 초의(草衣), 그리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자신의 둘째아들 정학유(丁學游) 등 이들은 모두 동갑내기로 문화적 활동과 학문적 토론을 이어갔다. 추사의 제자가 소치 허유이니 그 예술과 학문적 맥이 그렇게 이어온 것이며, 초의선사 또한 다산에게 학문을 이어받으니 그의 오묘한 문화적 연결고리가 후대까지 이어오게 된다.


조선 후기, 당시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실천학문으로서의 경학이었다. 탄압과 수탈의 늪에 빠져있던 백성의 아픔을 가까이서 직접 보고 느낀 다산은 학문의 헛된 이론에만 치우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복된 삶을 위해, 병든 조선의 사회를 치유하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모든 생각과 사상들이 깨어있던 선구자였다. 


관제와 군현제도 전제 부역 등 국가 경영을 위한 주제로 집필한 오늘날 개혁의 논리에도 손색없는 《경세유표(經世遺表)》, 지방장관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다해야할 덕목을 논리 정연하게 묶어놓은, 부패와 타락을 방지할 집약체 《목민심서牧民心書》가 있다. 옥사에 관한 형행의 원칙인 형법서《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포함해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펼쳤다. 이것이 18년간 전라도 강진 땅 유배지에서 체계화 시켰다.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와 북한강을 유람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며 자신의 미완작 《목민심서》를 완성시키고, 또다시 《흠흠신서》 완성을 보았으며, 《아언각비》등을 저술하여 세상에 내 놓았다. 앞선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도 이때 지은 것이다



강진군 다산초당


다산 선생의 시에서 비단 나이가 들어서 글을 자유롭게 쓴다는 뜻이 아니다. 시격이나, 시율을 맞추려다 오히려 시의 참맛을 잃어버리거나, 조선인이 중국의 시를 따라서 쓴다는 것은 실학사상과 어긋나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배와 귤이 각각 맛이 다름을 예로 들어 스스로 기호에 맞게 자유롭게 서술하는 것이 곧 즐거움이요, 남을 위해 보여 주기식이 아닌 까닭에 넓은 시상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음을 노래하였다. 아래는 제자 하나가 집필에 대해 망설이자, 명쾌하게 해준 답이다. 


“콩과 조는 하늘이 내린 맛좋은 곡식이다. 그것을 쪄서 술을 만들어도, 끓여서 떡을 만들어도 맛이 있다. 또 범벅과 유밀, 엿을 만들어도 모두 맛이 있다. 이미 옛사람의 책이 잘 갖추어졌다고 하여 스스로 저술을 포기할 이유가 있겠는가?”     


다산 선생의 자유로운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필자 또한 환갑진갑 다 지나고 60대 중반에 들어서니, 다산 선생의 시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믿음이 없는 자는 자유롭거나 혹은 외롭다. 불행하게도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면서, 종교에 기웃대고 신에게 빌붙어 뭔가를 얻으려 했다. 



만년의 다산 선생 초상과 남양주 다산생가 여유당


시나브로 나이가 들면서 오감도 다투어 둔화되어 가는데, 꽃은 안개 속에서 피어나기 시작했고, 귀에서는 징 소리, 갈대 스치는 바람 소리, 쇳소리 섞인 노랫가락 울리는데, 조락을 앞둔 삶에서 필사적 발버둥은 의미를 잃었다. 


봄날에 피는 꽃보다 가을 낙엽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세월에 에너지가 고갈되면서 시작된 것이리라. 다행히도 아이들 새된 소리에 귀가 열리고, 황혼의 황홀함에도 넋을 놓고, 진주귀걸이 소녀 눈망울에 눈길을 빼앗기는 감성이 들숨날숨을 위로한다. 


서산머리 붉은 해가 걸렸다. 황홀한 노을 바라보며 문득 갈 때를 떠올린다. 인생에서 주어진 일을 마감한 뒤라면 얼마나 좋을까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소원 한 줄 있다면, 허세 부리듯 헛기침 날리는 일 없이, 간혹 실수로 포장한 여유나 부렸으면 좋으련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