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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Nov 25. 2024

신께 빌다 ①

귀신과의 하루




반복하건대 믿음이 없는 자는 외롭다. 그러나 그만큼 자유로운 삶도 없으리라. 

자유. 나는 여태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자유를 누리는 만큼 외롭지는 않았다. 답사를 위해 사찰이나 성당에 들르면 본능처럼 기도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내게 믿음은, 강요되지 않은 삶에 의지대로 펼친다는 의미다.      

신의 존재 유무를 떠나 의지한다는 것은 결국은 기복신앙(祈福信仰)이다. 복을 빌고, 내 안위를 빌고, 자식의 앞길을 빌고, 건강도 빌고, 심지어 짝사랑하는 대상이 나를 향하도록 빌고, 반려동물의 행복까지 빌며, 로또라는 기적을 바라며 빈다. 이렇게 본다면 전지전능하신 신은 인간들 소리에 머리가 복잡할 터이다. 

대구 팔공산 관봉 갓바위 부처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자 고민 끝에 오른쪽으로 5° 기울었다. 인간들의 이기심에 비로봉같이 높은 덕과 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인내하는 중이다.      


옛사람들은 자고 나면 전쟁이요, 혹은 강제 부역에 시달리다, 호환·마마 역병에 걸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께 목숨을 구걸해야 했다. 우리나라에 미륵신앙이 남다르게 번성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내 대에서는 그저 이렇게 견딜 터이니, 내 후세, 내 아이들만은 미륵이 하생하여 고통이 없는 피안(彼岸)의 세상, 꽃비가 내리는 도솔천의 세상이 펼쳐지길 두 손 모아 그렇게 싹싹 빌었다. 서산마애삼존불 백제의 미소가 그랬고, 신라 수키와에 신라의 미소가 그랬고, 승탑의 부조에 원숭이와 사자의 미소 역시, 우리네 어머니들이 그토록 바랐던 극락을 간절하게 그려놓았던 것이다.      


“절기 좋은 입춘날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공덕을 쌓았는가? 굶주린 이, 밥 한 술 떠먹여 구난공덕(救難功德) 쌓았는가? 물이 넘치는 곳에 다리 놓아 월천공덕(越川功德) 쌓았는가? 병든 사람에게 약을 주는 활인공덕(活人功德) 쌓았는가?”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이 노랫말은 상여가 나갈 때 선소리꾼이 내는 소리다.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입춘 공덕을 심판받는 등 생시에 공덕을 얼마나 쌓았는가에 따라 극락과 지옥이 결정된다는 게 옛사람들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옛사람과 달리 현대인은 살아 있을 때 잘 먹고 잘살게 해달라고 신을 의지한다. 다분히 직설적이며 현실적이라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의식주가 해결되면서 믿음은 점차 구체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남보다 위에 서게 해달라며 악을 쓰듯 조른다.      



음악을 듣다가 불멍도 즐긴 행복한 밤이었다


어릴 때 홍역에 걸려 꼬박 보름을 앓다가, 꿈에 벽에 걸린 액자 속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난 후 기적처럼 살아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께서 이웃의 용한 무당을 불러다 양밥이라는 주술을 펼치셨단다. 내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주술 때문이라며 어머니 믿음은 확고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집을 날짜에 맞춰 팔기 위해 양밥을 행한 일이 있었다. 집이 팔리지 않아 답답하던 차에 현관에다 종이배를 접어 달아 놓으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아내의 말에 손수 배를 접어 실을 엮어 매달아 놓았던 기억이다. 그래선지 그야 말로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제값 받고 팔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귀신을 본 기억도 있다. 혼자 보았다면 정신 나간 놈이라고 하겠지만, 우리 뒷집 또락이 놈이랑 같이 본 것이라, 지금까지 너무나 선명하다. 소복을 입은 할머니가 또락이 놈을 부르며 같이 가자며 산을 타고 올라오던 장면, 그것도 한여름 대낮에 뒷산에서 여치를 잡다가 일어난 기겁한 기억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정말 귀신같이 달라붙어 추억을 빙자해 따라다닌다. 지금도 내 이름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한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소설가와 시인, 그리고 장돌뱅이 나, 이렇게 셋이 계절도 인생도 만추의 여행을 떠났다. 체험 마을 취재 경험이 있었던 터라 체험 마을 100여 곳 중에서 공기 맑고, 편안한, 그리고 마음씨 넉넉한 사무장이 운영하는 마을을 택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몇 해 전, 체험 마을 취재 당시 그곳에서 일박을 하게 되었다. 목가적 풍경과 함께 공기가 무척 맑아 사무장과 함께 술을 마신 뒤 홀로 정자에 텐트를 치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일어나 뒷산을 산책하고 돌아왔다. 사무장이 말하길, “밤사이 별일 없었나요? 꿈자리 사납지 않았나요?” 하며 묻는다. 오랜만에 잠을 깊게 잤다고 했더니 사연을 들려주었다. 

옛날에는 정자 바로 옆, 작은 계곡이 혼자 아이를 낳은 여자들이 몰래 갓난아이를 버리는 장소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홀로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인도 있고, 원하지 않은 임신으로 스스로 명을 끊어버린 사연도 있다고 한다.      




<a href="https://kr.freepik.com/free-photo/shallow-focus-shot-toe-newborn-baby_12751191.htm#fromView=keyword&page=1&position=27&uuid=c2797af2-eeac-4790-90e4-13af96857c9a">작가 wirestock 출처 Freepik</a>




듣지 않은 것만 못했다. 그러나 나는 게의 치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편안했다. 그 후로도 세 번이나 더 찾았고, 또 한 번 텐트에서 잠을 청해 꿀잠을 자기도 하였다. 


몇 해 전 띠동갑 동생들과 몇 주 전 아내와 둘이, 그리고 오늘 두 분 선생님과 다섯 번째 찾은 터였다. 쪽마당에서 장작불 피워놓고 기타와 하모니카로 별과 함께 즐겼다. 술이 빠질 수야 없지만, 두 분 선생님은 나만큼 술을 즐기지 않는다. 따라서 상대에 따라 주량을 조절하며 잠을 청했다. 


방 속에 작은 방이 하나 더 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소설가 서 선생님께 양보했다. 그러나 끝끝내 사양한다. 시인 차 선생께 권했더니 그분 역시 싫다며 손사래다. 어쩔 수 없이 가장 나이 어린 내가 독방을 차지했다.      

춥다. 등이 시려 이불을 더 덮었다. 바닥은 군불을 땐 터라 뜨거웠지만, 공기가 차다. 외풍이 세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냥 버티고 밤을 그렇게 났다. 몸이 어슬어슬해져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후에야 정상으로 돌아온 듯하였다. 마침, 차 시인이 칠순이라 솜씨를 발휘해 생굴 미역국을 끓여 대령했다. 두 분 다 참 맛나게 드신다. 상을 물리고 설거지를 끝낸 후 쓰레기까지 버리고 놀다간 흔적을 말끔하게 치워도 시간이 남는다. 우리는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따뜻한 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 선생님이 소설을 쓰듯 어젯밤 꿈 이야기를 꺼낸다. 갓 돌을 지났을 법한 아이들이 품속으로 달려들어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새벽에 눈을 떠보니 내가 잠자는 방 입구 아랫목에 어떤 여인이 앉아 있더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자, 내가 그녀의 방을 빼앗았다는 느낌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예쁘던가요?” 하고 물었다. “귀신은 얼굴이 없어” 한다. “좀 자세하게 보시지!” 했다. 이상하게 그 방에는 들어가기 싫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유독 찬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제야 내가 이곳에 버려져 죽은 아이와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서 선생님이 “역시!” 한다.  


나는 속으로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하며 그 혼령이 누구이든 간에 극락왕생을 빌었다. 그리고 우리는 돌아오던 길에 로또복권을 샀다. 똑같은 번호로 셋이 나눴던 까닭에 일등이 되면 주권 행사와 관련해 소송 걸 일을 미리 차단한 거였다. 장난처럼 웃었지만, 실낱같은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우리는 현실주의자니까 말이다. 역시 꽝이었지만, 3~4일은 희망에 부풀었었다.





각설하고,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가격이 너무 많이 내렸다. 빨리 팔고 그나마 공기가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질조차 없다. 뱃살공주가 답답해했다. 팔공산 갓바위에서 치성드리면 하나의 소원은 이뤄진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듯했다. 더불어 지난 경험을 떠올리며 현관문에 종이배를 접어 매달라는 엄명도 내린다. 나는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며 반항하는 중이다. 


토요일 새벽에 나를 깨운다. 4시에 일어나 트로티야를 만들어 도시락에 담고, 두유까지 만들어 보온병에 담아놓은 상태다. 더 버티다가 정말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하였다.      


대충 눈곱 떨고 양치만 한 후 비몽사몽 끌리다시피 차에 올랐다. 새벽안개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차!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왔다. 답답하긴 해도 뭐, 가는 내내 잠이나 잘까 하던 내 생각은 새벽의 생소한 풍경에 빼앗겼다. 입시철이라 다들 합격을 비는 와중에 우리는 집이 팔리게 해달라는 의외의 소원이 부처님 귀에는 더 잘 들릴 것이라는 뱃살공주의 정신 승리를 들으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일출 시각에 맞춰야 한다며 쉬지 않고 오른다. 나는 마음속으로 ‘약사여래불!’을 외며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가슴이 답답해지며 숨을 쉴 수 없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걸었다. 예전 같으면 한 번도 쉬지 않고 40여 분 만에 돌파하였겠지만, 이것도 나이라고 턱도 없다.   

   

그래도 딱 한 번 앉아서 물과 함께 재충전을 취한 후 갓바위라 부르는 관봉약사여래불이 굽어보는 정상에 섰다. 한 시간이 걸렸다. 때마침 구름 속에서 붉을 기운을 토해내며 해가 떠오른다. 구름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며 빛을 참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였다. 장엄한 기운을 고스란히 받았다. 아내 폰으로 사진을 담고 백팔 배를 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올려다본 부처님 얼굴에, 머리에 인 갓에도, 가부좌에도 아침햇살이 비추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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