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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Nov 29. 2024

신께 빌다 ②

하나의 소원만 들어주시는 부처님께



올려다본 부처님 얼굴에, 머리에 인 갓에도, 가부좌에도 아침햇살이 비추고 있다.  


아내는 옆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품이나 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입이 찢어지게 벌려 연심 하품을 해댄다. 옆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여인을 훔쳐보았다. 아이 사진과 함께 원하는 대학교와 전공과목이 적힌 프린트를 앞에 펼친 채 기도에 열중이다. 

문득 지난날 사법고시 1차 합격증을 앞에 놓고 기원하던 어느 노파의 모습도 겹쳤다. 지금이나 그때나 부럽긴 마찬가지다.     

 

여기서 고백할 것이 있다. 나는 이사를 하여도 좋고 가지 않으면 더 좋다. 그리고 가더라도 더 늦게 갈수록 더 좋았다. 따라서 내가 백팔 배를 하는 까닭은 아내의 의도와는 조금 달랐다. 물론, 내용은 비밀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이렇게 힘들지만, 버티고 버티며, 스스로 목숨을 단죄하지 않고 살아 있게 해주셔서 고맙다는 뜻은 빠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내의 희망을 아주 잊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내의 행복이 나의 행복과 직결되며, 아내의 고통이 내게 돌아올 때면 확장을 거듭하면서 조약돌이 바윗덩이가 되기 때문이다.      

산에서 내려와 아내가 준비한 트로티야에 따뜻한 두유를 곁들여 맛나게 먹었다. 돌아오는 길, 팔공산 순환도로를 돌아서 왔다. 그야말로 만추의 색상에 눈이 호강한다. 무르익은 색채에 양감과 질감, 역광이 주는 신이한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단풍과 하늘이 맞닿은 네거티브 한 선의 선명함이 나와 하늘을 구분하고 있다.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자연과 어우러질 때 신은 인간에게 자신의 능력을 살짝 드러내 보인다. 

집으로 향했다. 신께 빌고 난 후 곧바로 집으로 들어와야 한다. 편의점도 들리면 소원은 말짱 꽝이다. 내게 충만한 신의 기운이 중간에 세는 것을 막기 위한 나름의 법칙이며 지혜이자, 간절함이 일으킨 소원 성취 긍정의 기제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여전히 집을 보겠다는 사람은 없다. 토요일 새벽에 어김없이 일어나 팔공산으로 향했다. 인근 도시에 사는 막내 처제가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예수님께 몰방하는 작은 언니를 따라 열심히 교회에 다니던 처제였다. 그러던 중 불교에 관심이 간다며 따라나선 길이다. 아내와 처제 이렇게 셋이 갓바위를 향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힘들기는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나마 요령이 생겨 시간을 맞추려는 욕심은 버렸다. 


가장 가파른 계단만 남겨 둔 8부 능선까지 올랐을 때다. 자그마한 체구의 꼬부랑 할머니가 내려오고 있다. 지팡이와 우산을 한 손에 잡고, 바들바들 떨면서 힘겹게 돌계단을 디딘다. 일촉즉발 굽은 허리로 인해 머리가 앞으로 꼬꾸라질 것만 같았다. 앞에서 팔을 잡아드렸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오히려 나로 인해 사고가 날 수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할머니에게는 한두 번의 길이 아님을 직감하였다. 한쪽 팔로 난간에 의지하면서 서두르지 않았다. 보는 이가 조마조마할 뿐이었다. 화가 났다. 뭐 그토록 간절함이 있어 이처럼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지 속이 상했다. 부디 무탈하게 내려가길 빌었다. 자식들이 알까? 이른 새벽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복을 빌어야 하는 어미의 심정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케이블카를 관봉 정상까지 설치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구름이 잔뜩 깔린 터라 일출은 기대할 수 없었다. 또한 며칠 전 수능시험이 끝난 터라 부처님 앞이 한산하다. 대신 바람이 세차게 불고 안개가 만들어낸 물보라가 옆으로 들이치며 날씨조차 감사납기 짝이 없다. 부처님도 온몸을 내맡겨 잔뜩 찌푸린 듯하다. 사진을 찍으려니 휴대전화기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차장에서 차 지붕에 올려놓고 그냥 온 듯하였다. 그곳에 담긴 자료가 더 걱정이었다. 자매는 나란히 앉아 불상만 쳐다보고 있다. 전화기 걱정에 백팔 배를 어떻게 했는지 모른다.      


내려와 휴대전화부터 찾았다. 대한민국은 좋은 나라가 분명하였다. 차 지붕에서 햇살을 받으며 얌전하게 잠자고 있는 전화기를 쓰다듬었다. 돌아오는 길, 신호 대기 중에 뒤에서 보니 앞에 정차해 있던 처제 차가 살짝 움직인다. 그러다 차에서 내려 앞으로 간다. 

순간적으로 알았다. 브레이크를 놓치고 뒤차 꽁무니에 접촉했다. 차를 갓길로 움직였다. 고급 승용차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중년의 여인이 내린다. 목덜미를 움켜잡은 채다. 나는 저절로 영화의 한 장면 같아 웃음이 났다. 앞차 뒤 범퍼에 아무런 자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수습 후 돌아왔지만, 찝찝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처제에게 전화가 왔다. 그 중년 여인은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다고 전화 왔더라고 한다. 그녀 머리가 유리로 된 것이 분명하다. 


속으로 그랬다. ‘그 여자 땡잡았군! 전생에 무슨 복을 지어서 그따위 행운을 주시는지, 짐작컨대 부처님께서 우릴 실험하시는 게야.’     



대구 팔공산 관봉 갓바위 부처.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자 고민 끝에 오른쪽으로 5° 기울었다. 인간들의 이기심에 비로봉같이 높은 덕과 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인내하는 중이다




아내가 다음 주 토요일 새벽에 또 갓바위 올라야 한다며 언어로 된 초대장을 날린다. 갓바위는 세 번은 올라야 소원성취 한다나? 


분명하게 알아둘 것이 있다. 갓바위 부처님은 하나의 소원은 꼭 들어주신다. 그러나 두 개는 장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의과대학에 합격해달라고 빌었다. 합격은 시켜주지만, 졸업까지는 장담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합격 후, 학교에 무탈하게 잘 다니며, 상위 성적으로 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졸업하고, 꿈의 직장에 취업하게 하려면 무려 4~5번의 소원이 이뤄져야 한다. 도무지 몇 번을 올라야 한다는 말인지 계산해 보시면 알 것이다. 


사법고시도 마찬가지다. 합격을 시켜주나, 임용은 장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임용장 받으러 가는 도중에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첫 출근에 인생이 끝장날 수도 있음을 잊지 말라. 


결론은 한 가지다. 욕심부리지 말라. 늘 감사하고, 순하고 착하게, 그리고 지금까지 이렇게 살게 해준 데 대한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내가 간혹 문화해설사 지망생들 교육 때 빠지지 않고 들려주는 이야기다. 물론 나는 그렇게 살지 않지만 말이다. 대신 노력 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제가 기특하지 않습니까, 부처님? 저를 눈여겨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각설, 기복종교란 단언컨대 집착이 넘치자, 방법이 없어 신의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지는 것 이상도 아니다. 초자연적인 인연의 끝, 믿음의 강도에 따라 우리는 절대신을 향한 믿음을 증명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시간 실향민의 어리석음을 깨달아야 한다. 정신적인 소외에 빠진 나머지 희열과 지고지순한 안식에 스스로 녹아들려는 여린 마음이 만들어낸 행위다. 하지만 나는 지금 불손하게도 이만큼 믿음을 증명해 보였으면, 이제는 신의 존재를 증명해 내게 기적을 일으켜 보라고 조르는 중이다. 한편으로 나는 이 기적과도 같은 기적, 하늘의 은혜를 매일 받으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께 의지한다는 의미는 귀신의 존재도 인정한다는 뜻이다. 고로 나는 여자 귀신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째려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일로 인해 긍정의 힘이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는가를 경험하였다. 


그리고 나는 내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 이르기까지 곰삭아 문드러진 비극의 악취를 털어내기 위해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춘다. 선현들이 갈겨놓은 지혜의 부스러기를 읽으며 마음에 갑옷을 두른 양하고, 한 줄 글을 취하면서 세상의 온갖 지혜를 얻은 척 으스댄다. 실로 거울을 마주하기 두려운 까닭이다.     

 

생각하면 절망에 가까운, 죽음과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지척에 있으면서도 여유로운 미소를 띠기 위해 애를 쓴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마치 세상에 버려진 듯한 자신을 애써 긍정하며 내일은 어제와 다를 것이라 자위하며 오늘은 술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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