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에선 놈의 고백
뜬금없다.
“시신 기증은 의과대학에서만 받는다며?”
연명치료 사전의향서는 물론, 장기기증까지 마쳤는데 빈 육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말에 뒤통수에서부터 등줄기까지 쌍글한 바람이 훑는다. 더 듣지 않아도 상황이 짐작되었다. 그리 넓지 않은 도로가 휑하게 느껴졌다. 정지된 시간, 질주하는 차들의 연속영상이 하나로 묶인 듯했다. 공전과 자전이 멈춘 지구에서 우리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고요가 찾아왔다. 이렇게 큰 지구가 돌지만, 그동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친구 발걸음에 보폭을 맞추려 애쓰는 놈을 보자 현실로 돌아왔다.
뭐라 대꾸하려 했지만 도무지 백지가 된 머릿속에 난삽한 부유물 뿐 알갱이가 없다. 사거리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다.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체구지만 눈빛만큼은 야생의 맹수를 연상케 했다. 횡단보도가 파란 불로 바뀌었다. 걸음을 재촉했다. 네놈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반 보폭 앞서 걷는다. 무의식적 억압된 것의 귀환, 감출 수 없는 뒷모습에서 진실을 보았다. 어떤 힘으로도 버틸 수 없는 존재의 시공이 어깻죽지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목에서 끈끈한 액이 울컥하고 치민다.
순식간에 사춘기 시절이 파노라마 영상으로 떠올랐다. 단발머리 여고생 뒤를 쫓고, 동산에 올라 통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고, 텃밭에서 야외전축 틀어놓고 다리 떨면서 고고 춤을 추던, 그랬던 우리가 벌써 생의 결말을 이야기할 때가 온 것인가.
목적했던 식당에 들어와 밖이 훤히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너는 먹기만 하라며 불판에 더미를 쌓듯 올린다. 요놈 고기 기름은 불포화지방산이라 많이 먹어도 된다는 의사가 그렇게 고맙단다. 고기가 익어가는 만큼 친구 표정도 맑게 변해갔다. 때마침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욕심 없는 친구였다. 여린 마음에 늘 남을 아파하던 친구다.
세상 끝자락을 경험하고 보니 그동안 회한이 밀려오는 듯했다. 몇 해 전에 몹쓸 병 진단을 받았다. 일찍 발견한 터라 놈의 성정에 노력을 더하면서 지금까지 결과도 좋다. 어쩔 수 없이 일손을 놓았지만, 하루 4만 보, 한 달에 130만 보 이상 걸었다니 오래 살기보다 건강하게 살기 위한 애착이 존경스러웠다.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혼자라 거슬리는 것이 없다며 웃는다. 그런 입가가 메마르다. 소원이 있다면 술잔을 부딪치며 예전처럼 네놈에게 욕지거리를 섞어 대화 해봤으면 한다. 그제야 참았던 말을 내뱉었다.
“미친놈….”
히히 웃는다. 소리가 맑다. 듣고 싶었던 음성이다. 내가 그랬다.
“장가나 가보고 죽어라. 시까!”
입속 내용물이 흐르지 않게 입술을 모아 이렇게 답한다.
“하늘에 죄짓는 일이다.”
죄는 하늘이 네놈에게 지은 것이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형이 부모 산소를 밀어버리기로 하였다. 묘소 인근에 조카 명의로 된 공터가 있어 합치면 제법 너른 땅이 확보될 것이라 한다. 앞으로 큰 도로가 지나가는 것이 욕심에 한몫했으리라는 친구 생각이었다. 자신이 죽으면 화장한 후 골분은 어머니 산소 주위에 뿌려달라고 조카에게 부탁했던 터였다. 소유의 아파트와 얼마 되지 않은 현금을 대가로 약속했지만, 이제는 그도 소용없게 되었다는 친구는 사후 장기기증 후 텅 비어버린 몸은 의과대학 해부용으로 결론 내렸던 듯했다.
목으로 넘어가던 텁텁한 막걸리가 불고기와 섞이자, 속에서 도사리고 있던 반란군을 부추기고, 친구가 음료수 잔을 들어 내 술잔과 부딪치자 순식간에 목에 이물질이 걸린 듯했다. 머릿속 상상이 영상으로 완성되면서 도망치듯 화장실로 피해야 했다.
입을 헹구고 얼굴에 물을 묻혔다. 정수리가 무거워 머리를 숙여 물을 머리에 흘려보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물이 입술에 닿고 떨어진다. 힘없는 친구라고 무시했던 지난날이 아프도록 후회스럽다. 어쭙잖은 지식이 지혜나 용기에 비하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알 것도 같았다. 가식 서린 만용에 가려 진실한 용기가 평가절하된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간다는 것이 호락하지 않았다. 자유를 누리는 만큼 인간이 쳐놓은 발목지뢰가 많았다. 연락 없던 친구가 대뜸 천사의 얼굴로 다가오고, 다단계 표적이 되고, 가난한 여자 목표가 되고, 투기꾼의 도구가 되고, 벗을 빙자한 사기꾼의 대상이 되었다. 기승전결 돈으로 귀결되는 관계가 질린다며 세상 빛이 없는 곳으로 숨고 싶다는 말이다. 궁색하나 오로지 자유만을 추구하던 영혼에 툭툭 치고 다가오는 실타래와 같이 얽힌 관계망이 두렵다는 의미였다.
얼마가 될지 모를 시간이지만, 자신이 누렸던 고독에 자유를 더하고 싶다는 뜻이다.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이냐고 되묻는다. 자기연민의 나약함을 위선으로 포장한, 골목 구석에 나뒹구는 메마른 나뭇잎 같은 인간에게 되물을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 해맑게 툭툭 던지는 친구가 부러웠다. 그랬다. 결국 비운다는 의미였다. 분별과 망상이 끊어진, 의식의 뜻하는 바가 소멸된, 꿈도 정신도 놓아버린 망연(茫然)의 상태를 넘어 기어이 내가 사라지고, 세상이 사라지고, 우주가 사라진 무(無)와 타협했다. 남은 자의 몫이란 실체도 형체도 없는 사랑이란 이름의 동정일 뿐이다.
친구 눈빛이 마치 너는 어찌할 것이냐 되묻는 듯하다. 추억을 빙자해 하루를 버티며 미련하게 살아가는, 지배당하는 데 이골이 난, 구속된 삶이 행복이라 여겨왔던, 한 번도 생의 끝자락을 떠올려 본 일 없는 나는, 실로 가슴에 두려움이 성큼 들어앉는다. 그날부터 무책임하게 세상에 뿌려놓은 존재와 더불어 텅 빈 육신 하나가 어깨에 올라탔다.
앞에서 헤죽대며 바라보는 친구 얼굴에 내가 그려졌다. 방금 주검이라는 환각 체험을 하였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았는데, 내일이 생의 끝인 것처럼 살라고 강요한다. 황혼의 노을을 타고 세상을 볼 때라는 뜻이다.
화분에 핀 빨간 꽃을 보며 아내가 중얼대듯 하던 말이다.
“나이 먹어서는 화초도 키워선 안 돼”
세상이 소멸한 후 남겨진 것들에 대한 애정 어린 자문자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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