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霜降)에 쓰다

싸늘한 바람이 들어와 살갗을 건드린다

by 박필우입니다



춥다. 아침저녁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분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 나도 모르게 이불 둘둘 감아 웅크리고 있다. 벌써 따뜻함이 그리워지는 계절인가! 질리도록 심한 변덕이다.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한여름의 잔재가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건만….


부모님 묘소 벌초 후 기대에 들떠 다녀온 산사의 풍경도, 모전석탑 주위의 색상도, 만고풍상을 겪은 석탑 구조물 하나하나에까지 색색 가지 단풍이 들었다. 화려한 색상에 딱 들어맞는 질감, 태양이 주는 편견 없는 빛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여 수목(樹木) 골고루 초월적 존재로서 인간을 매료시킬 색상을 입혀놓았다.

내 사치스러운 감성의 기복이 엮어낸 시간이 또 이렇게 흐르고 있다. 작년 가을 설렘의 추억보다, 세월의 빠름을 탓하는 궁상은 오늘부터 시작하려 하는가. 요즘엔 허허롭고 메마른 웃음이 시도 때도 없이 풀어져 나온다. 무미건조한 감정에 혀가 얼얼하게 매운맛으로 반전을 꿈꾸지만, 약발은 그때뿐이다. 열어 놓은 창으로 또 싸늘한 바람이 들어와 살갗을 건드린다.



1979. 유화 첫 그림이자 마지막 그림이다. 가슴이 이토록 저려오는 까닭이 뭘까. 눈에 물도 많아졌다.


고등학교 1학년, 이성에 빠르게 눈뜨기 시작할 무렵 미술반 야외스케치 나갈 때였다. 막연한 설렘에 힐끗 곁눈질하던 하얀 옷깃의 여학생보다, 눈앞에 펼쳐진 농익은 가을에 홀딱 반해 그곳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 더 좋았다. 눈이 부시게 하얀 도화지 펼쳐만 놓고 콩닥거리는 감성을 주체 못 해 ‘잠깐만 놀다가 그려야지’ 하며 눈과 몸과 마음에 가을을 입히며 다녔다.


빼어나게 가을이 물든 나뭇잎만을 골라 스케치북에 끼워두면 나만의 가을을 훔친 양 행복했었다. 아뿔싸! 결국 도화지엔 손도 대지 못했다. 대신 부러진 이젤 다리를 든 선배로부터 엉덩이가 불이 나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학교에서 기다리던 미술 선생님께 콩죽 같은 땀을 흘리며 기압을 받았다. 그래도 돌아서 먼 곳을 향해 알록달록한 기억을 되살리던 감수성 발라당 까진 소년이 있었는데….


어느 날 늦잠을 잔 뒤에 일어나 본 거울에 비친 게슴츠레한 눈, 각질 벗겨질 듯한 피부, 하룻밤 사이 덥수룩하게 자라있는 턱수염, 그 속에 희끗희끗 솟은 털, 황량하기 짝이 없는 텅 빈 가슴과 까칠한 감정의 질감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쓰레기하치장같이 악취 풍기는 길고 긴 현실의 터널을 거슬러 언젠가 쓸모없다 버려둔 알맹이 하나 찾아볼까. 조약돌만 한 것이라도 건질 거나 있으려나? 이런 무모한 희망이 이상하게 성공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데 말이다. 그러나 노동의 노고에 비해 열락을 욕망하는 저질의 감성이 앞선 까닭에 어쩌면 포기가 나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꾸기 마련이다. 그래,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과 머리를 맑게 하듯, 계절의 초입에서 한 번씩 뒤를 돌아보는 것, 그리 나쁘진 않을 거다.


추억한다는 것, 시리면서 부끄럽고, 아프면서 창피하기까지 한 기억을 굳이 되살린다는 것은 나만의 꿈이 있어서다. 아련한 유년 시절의 꿈을 머리가 아닌 가슴에 담는다. 추억의 되새김질은 삶의 저변에 숙성된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삶도 인생도 서리가 내리는 계절이긴 하지만, 오동지 섣달이 되어서 후회한다는 것은 차마 못 할 짓이다.


벌써? 이런! 환갑과 진갑까지 넘긴 세월을 반주 삼아 살고 있다. 그래선지 기차여행을 할 때면 역방향에 앉아서 가기 좋아한다. 바깥 풍경에 시선을 주기도 전에 휙휙 지나가 버리고, 또 새로운 풍경을 화급하게 내려놓는 정방향이 부담스럽다. 마치 미래를 향한 불안한 질주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기차가 뒤로 달리면서 내려놓는 풍경들은 시각적으로 매우 편안하다. 눈에 익은 풍경이 점점 작아지며 새로운 그림이 눈앞에 펼쳐 보이는 것이 참 좋다. 더 오래, 점차 멀어지는 모습을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볼 수 있어서다.


머리와 가슴은 가을이 만연한데 벌써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라기에 미련에 몇 자 적는다. 더 늦기 전에 괴나리봇짐을 들쳐 매고 길을 나서자.




상강 (霜降)

한로(寒露)와 입동(立冬) 사이에 들며, 태양의 황경이 210도에 이를 때로 양력으로 10월 23일 무렵이 된다. 이 시기는 가을의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는 대신에 밤의 기온이 매우 낮아지는 때이다. 따라서 수증기가 지표에서 엉겨 서리가 내리며, 온도가 더 낮아지면 첫 얼음이 얼기도 한다.(한민족대백과사전. 김종대)




눈을 떴을 때 희망이 기다리고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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