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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사랑, 삶, 그리고 나

by 은도

제주살이의 시작은 여행이었다. 목적도 계획도 기한도 없이 자유로이 떠도는 여행. 그 여행을 시작하며 내가 선택한 첫 숙소는 제주 동쪽 어느 고즈넉한 마을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였다. 수많은 게스트하우스 중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그곳만의 독특한 문화 때문이었다. 그 독특한 문화란 매일 저녁 8시, 게스트들이 모여 ‘사랑, 삶, 그리고 나’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낭만의 섬 제주에서 여행자들이 모여 사랑과 삶과 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니,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간질거리는 일이 아닌가.


3월의 끝자락에 도착한 제주는 설렘이 가득했다. 거리에는 분홍빛이 은은히 번진 벚꽃잎이 흩날리고, 그 꽃잎이 내려앉은 얼굴들엔 미소가 만발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니는 그들의 눈에 여기저기 사랑이 담겼다.


[002] 벚꽃 사진.jpg 제주 신풍리


저녁 8시가 다가오자, 봄의 활기로 붕 뜬 공기 사이 차분한 어둠이 새어들었다. 게스트하우스 2층 거실에는 벽면 가득 책이 꽂힌 나무 책장과 기다란 나무 테이블이 아늑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달빛을 닮은 조명 아래 열 명의 사람이 모였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어색한 침묵을 깨며 인사를 건넸다. 모임의 시작은 주제에 대한 질문을 적는 것이었다. 각자 ‘사랑, 삶, 나’에 대한 질문을 적은 질문지를 모으고, 한 사람을 지목한 뒤 질문지를 뽑아 그 안에 적힌 질문을 하면 지목당한 사람이 답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질문지를 받아 들고 고민했다. 흔한 주제들이지만 막상 이와 관련해서 질문을 하라니, 텅 빈 질문지가 꼭 내 머릿속 같았다. 고민이 되기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각자 침묵 속에 텅 빈 질문지를 바라보다 이따금씩 낮은 탄식을 내뱉었으니 말이다. 한참이 지나서야 모두 어렵사리 질문지를 채웠다.


이윽고 시작된 대화의 시간, 질문지를 하나씩 열어서 나온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언제 내 존재가 작아진다고 느끼나요?’

‘어느 순간에 사랑에 빠지나요?’

‘언제 불안을 느끼나요? 불안을 떨쳐내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면요?’

‘내 안에 사랑이 몇 퍼센트나 있다고 생각하나요?’


질문의 주제는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사실 그 경계는 모호했다. 그 세 가지는 우리 안에서 얼기설기 얽혀 있는 것이기에. 어떤 주제에 대한 질문이든 사람들의 대답은 ‘나’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어떤 경험을 했는지, 나는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지, 나는 무엇을 꿈꾸는지.


그 이야기 속에는 각자의 아픔이 어려 있기도 했다. 누군가는 이별의 아픔을, 누군가는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겪은 아픔을, 누군가는 꿈과 현실 사이 괴리에서 느끼는 아픔을, 누군가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아픔을 터놓았다. 어떤 이들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처음 보는 사람들이기에 아픔을 꺼내 보이기 더 수월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몰랐고, 그렇기에 편견도 없었다. 그 사람이 느끼고 표현하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감했다. 내일 헤어질 사람들이기에 부끄러움도, 내 이야기가 새어 나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편견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찾아 그곳에 모인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002] 서우봉.jpg 서우봉


첫 만남에 서늘했던 공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온기로 데워졌다. 그사이 어둠은 깊어졌고, 달빛은 짙어졌다. 봄의 들뜬 공기와 그윽한 달빛에 취한 듯 삶에 대한 고민과 아픔에 대한 이야기는 점차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갔다. 태양빛이 쨍한 대낮에는 하지 못했을 이야기를 나눴다.


그 끝에 누군가 질문지에 적히지 않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삶에서 사랑은 얼마나 중요한가?’


내 삶에서 사랑은 언제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였다. 살아가는 이유이자 원동력이었고, 인생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부부의 연을 맺었던 그에게 배신당한 후,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과거의 상처와 그 상처로 인해 반항처럼 했던 다짐이 떠올라 나는 '사랑은 내 삶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차마 답하지 못했다.


그곳에 있던 그 누구도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아마도 대부분 나와 비슷한 답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모인 이들이니까. 하지만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던 건 각자가 간직한 아픔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사랑했던 대상으로부터 상처받았던 아픔, 그 아픔이 여전히 마음을 채우고 있어 사랑이 비집고 들어올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삶에서 사랑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무언가를, 누군가를 사랑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러면 또다시 아플 것 같아서.


얼마간 침묵이 이어졌을까, 누군가가 말했다. 사랑은 모든 감정의 근원이라고. 사랑이 없다면 좌절도, 아픔도, 절망도 없다고. 우리 삶에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그렇기에 ‘사랑은 삶의 전부’라고.


[002] 북촌리 아침 바다.jpg 제주 북촌리


확신에 찬 그 말은 그 후로 혼자인 시간 속 꽤 자주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인적 드문 바닷가에서 고요를 허물며 파도 소리가 밀려들 때, 비 온 뒤 숲속에서 젖은 풀냄새를 맡을 때, 숨을 헐떡이며 오름 정상에 올라 눈을 감고 바람을 느낄 때, 그 말이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틈을 만들었다. 그 틈이 넓어질수록 나는 조금씩 인정하게 된다. 나는 사랑때문에 상처받았음에도 또다시 사랑하고 싶어 홀로 이곳에 왔다는 것을, 마음을 가득 채운 아픔을 조금씩 비워내고 그 공간을 사랑으로 채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을. 그럴수록 선명히 느낀다. 그 공간을 만들기 위해 지금 나는 오롯이 혼자이기로 선택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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