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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제주 사춘기록

by 은도

사춘기(思春期), 이 시기를 지나는 십 대 청소년들은 신체적, 정서적, 인지적으로 격동의 변화를 겪으며 불안과 혼란을 경험한다.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에 고뇌하고 방황하며 정체성을 확립해 간다.


내적 불안을 겉으로 드러내고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자유로이 방황하는 일, 사춘기이기에 용인되는 특권이다. 이십 대부터는 인생의 과업들을 착실히 수행해 나가기를 요구받는다. 대학에 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법적 성인에게 불안을 드러낼 자격과 방황을 경험할 자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 성인을 본다면 사회는 그의 이마에 ‘인생의 낙오자’라는 낙인을 찍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내 눈에 세상은 그랬다. 공부만 하는 학창 시절을 지나 대학을 졸업하면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이, 내가 속한 이 사회가 내게 그것을 요구한다고 느꼈다. 그중 하나라도 놓친다면 세상이 나를 실패자로 바라볼까 두려웠다. 그렇기에 학창 시절부터 나는 눈앞의 과제를 제때 수행해 나가기 바빴다.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할 여유도, 방황할 시간도 없었다. 문득 내 인생에 의심이 번질 때면 고민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일단 했다. 일단 대학에 가고, 일단 졸업을 하고, 일단 취직을 하고, 일단 결혼을 하고. 그렇게 일단 하면 그다음 스텝은 자동으로 이어지는 줄 알았다. 결혼의 다음 스텝이 이혼이 되기 전까지는.


[001] 백약이오름.jpg 백약이오름


물이 가득 찬 컵에, 그 아슬아슬한 표면에, 단 한 방울의 물이 더해지면 물이 와르르 흘러넘친다. 한 방울이 아니라 간신히 컵 모서리에 걸쳐져 있던 방울들까지 부여잡고 흘러내린다. 결혼은 내 인생에서 꼭 마지막 그 한 방울 같았다. ‘일단’이 쌓여 아슬아슬해진 내 인생에 결혼이 더해지자, 과거의 내 인생까지 모조리 흘러내렸다. 처음에는 믿음과 사랑이, 그다음엔 사랑을 믿었던 내 어리석음이, 그리고 그다음엔 어리석음을 만든 나 자신이.


하지만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내리는 세상 속 나보다 더 중요했던 건 남들의 시선이었다. 사회가 정한 ‘보편적 삶’의 궤도에서 벗어난 나를 세상은 어떻게 바라볼까, 어떻게 평가할까. 편견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진 시대라고는 하지만 이미 ‘정상적인’ 궤도에서 튕겨 나간 사람의 눈에 세상은 그 궤도 밖에 있는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자극적인 문구로 유명인의 이혼 소식을 헤드라인에 걸어 놓은 기사들, 그 한 가지 사건으로 그들의 인성까지 판단하는 댓글들, 아직 내 속사정을 모르는 지인들이 당연한 수순인 듯 물어오는 자녀 계획에 대한 질문들. 그것들이 날카로운 가시덤불을 이루어 담장을 타고 올라오며 나를 세상의 울타리에서 점점 더 밖으로, 밖으로 밀어내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사람들 사이에 섞여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나는 무자비한 적막이 흐르는 어둠 속에 고립된 것 같았다. 내가 속했던 세상에 더 이상 속할 수 없는 느낌. 시간이 멈춘 듯 영원히 그 적막 한가운데에 머무를 것 같은 느낌.


인간이란 지독히 혼자일 때만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일까. 멈춰보아야 비로소 내가 보이는 걸까. 혼자인 시간 속에 질문들이 떠올랐다. 남들의 기준에 맞춰 세상이 정해 놓은 궤도를 따라가기 바빠 오래전 ‘일단’ 묻어두었던 질문들, ‘나는 무엇을 좋아하나,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와 같은 질문들이 말이다.


삼십 대 중반, 그렇게 사춘기가 다시 찾아왔다.


[001] 절물 숲길.jpg 절물자연휴양림


두 번째 사춘기, 아니 오춘기라고 해야 할까. 오춘기, 일반적으로 50대 전후 갱년기를 가리키지만, 성인이 된 이후 혼란을 겪는 시기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한다. 영어로는 ‘quarter-life crisis(30대 전후에 심리적 불안감을 겪는 시기)’, ‘midlife crisis(50대 전후에 심리적 불안감을 겪는 시기)’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결국 어느 문화권이든 성인들도 불안과 혼란의 시기를 겪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성인으로 살아가는 기나긴 시간 속에서 변곡점을 맞이하지 않는 인생은 없다. 변화는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변화가 찾아오면 잠시 멈추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한다. 앞이 캄캄하고 막막한 변화의 시기에 인생의 방향은 저절로 찾아지지 않는다. 방황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방황하는 우리를 인정하고 기다려줄 줄 아는 따뜻한 세상이 필요하다.


내게 세상은 아직 차갑고 냉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찾아온 나의 사춘기를 제대로 보내보기로 했다. 제대로 방황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제주에 왔다. 내가 살던 세상과 되도록 멀리 떨어진 곳, 너른 바다와 깊은 숲을 가진 곳, 그래서 잠시 멈추고 충분히 머물러도 된다고 기꺼이 품을 내어줄 것 같은 곳.


나와 약속한 1년이 지나면, 짙은 어둠 속 세상과 동떨어진 어딘가에서 지독히 홀로 있을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잠시 멈추고 마음 가는 대로 방황해 보라고. 생각보다 별일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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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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