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제주는 온통 봄의 색깔로 칠해져 있었다. 파란 하늘, 초록 풀과 나무, 파랑과 초록을 섞어 물에 타 놓은 듯한 바다, 노란 유채꽃, 분홍이 은은히 번진 벚꽃. 봄빛을 만끽하며 도로를 달리던 나를 새빨간 신호등이 멈춰 세웠다. 운전석 창문을 열었다. 커다란 현수막이 눈에 걸렸다. 현수막에는 짧은 문구와 함께 붉은 동백꽃이 그려져 있었다.
‘제77주년 4.3 희생자 추념식 - 2025년 4월 3일 오전 10시 제주4.3평화공원’
며칠 후 4월 3일, 아침 일찍 4.3 평화공원으로 향했다. 행사 시작을 1시간 앞두고 평화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의 초입에 들어서자,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긴 추모행렬을 따라 천천히 길을 오르던 중 룸미러를 통해 보이는 뒤차 내부에 시선이 머물렀다.
뒤차에는 부녀지간 같아 보이는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그중 내 시선은 조수석에 앉은 노인을 향했다. 야위고 주름진 얼굴에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머리에는 중절모를 얹었고, 얼핏 보이는 상의로 미루어 보아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듯했다. 다소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그는 77년 전 그날, 이 비극의 섬에 있었을까? 있었다면 무슨 일을 겪었을까? 역사 속에 묻힌 먼 과거 일이라 생각했던 그 비극이 내 가까이에 와 있는 듯했다. 그 노인과 나 사이의 거리만큼.
10분 늦게 도착한 평화공원에서는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나는 수많은 인파의 맨 뒤편에 자리를 잡고 섰다. 바로 전날까지 며칠간 맑았던 제주의 하늘은 이날 유독 흐렸다. 거센 바람이 외투의 앞섶을 열고 검은색 셔츠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가슴 깊은 곳까지 시리도록 자꾸만 새어 들어왔다. 결국 나는 외투의 지퍼를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았다. 많은 이들이 추운 날씨에도 외투를 걸치지 않은 채 검은색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단단히 여민 흰색 패딩이 부끄러워졌다.
그들의 검은 가슴께를 자세히 보니 붉은 동백꽃이 하나씩 피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죽 늘어선 천막 중 한 곳에서 동백꽃 브로치와 책자, 물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동백꽃은 제주 4.3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꽃이다. ‘4.3의 영혼들이 붉은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스러져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천막으로 다가가 브로치를 받아 검은색 셔츠 깃에 달았다. 작고 붉은 꽃을 달았을 뿐인데 마음이 무거워졌다.
잠시 후 희생자를 위한 묵념의 시간,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떨군 채 눈을 감았다. 그곳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사라진 듯한 침묵이 느껴졌다. 엄숙한 음악 소리를 배경으로 이따금씩 훌쩍이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나는 속으로 적당한 말을 골랐다.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바랍니다.’ , ‘그곳에서는 평안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어쩐지 그 어떤 말도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어떤 말도 경솔하게 느껴져 감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결국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생각을 지우고 그저 진심을 담은 마음이 그들에게 닿기를 바랐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 정치인들이 나와 기념사를 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존경하는 제주도민 여러분’으로 시작하여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유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경과보고를 하고, 앞으로의 공약을 이야기했다. 그 말들이 곱게 들리지 않았던 건 불과 몇 달 전,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을 향해 또다시 총칼을 겨누었던 사건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까. 내 가족들이, 내 친구들이, 혹은 내가 ‘붉은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스러져간’ 영혼이 될 수도 있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이어 희생자 유족의 사연이 영상으로 전해졌다. 아들, 손녀와 손을 잡고 화면에 등장한 노인은 어린 시절, 부모님과 생이별해야 했던 사연을 전했다. 여느 때와 같이 함께 식사를 하고 집을 나선 후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자신을 홀로 친척 집에 떠나보내며 어서 가라고 손짓하던 어머니, 그 기억을 떠올리며 흐느끼던 노인은 75년 만에 아버지의 유골을 찾았다고 했다. 아버지를 목놓아 부르며 유골함을 쓰다듬던 노인의 모습은, “나같이 부모 못 찾은 사람들 꼭 한 번 피검사라도 하고, 할 수 있는 거 한 번 다 찾아서 해보세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원이라도 풀지...”라는 노인의 말은, 4.3의 비극이 과거가 아닌 우리의 현재임을 선명히 말해주었다.
77년 전 광복 이후, 이곳에서는 이념의 대립이 폭력이 되었고, 그 폭력은 광기가 되어 이 땅을 무섭도록 잔인하게 집어삼켰다. 그 과정에서 제주도는 ‘레드 아일랜드’, 일명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권력의 광기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었던 제주도, 차가운 땅으로 붉게 번져 스러져간 죄 없는 영혼들, 시뻘건 화마에 사라져 간 그들의 삶의 터전,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제주도는 찬란한 제빛을 잃은 채 온통 붉게 타들어 가야 했다.
그날, 나는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 사람들과 ‘사랑, 삶, 나’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이는 연인과의 이별 후 이곳에 와 매일같이 오름을 오르고 있다고 했고, 직장에서 종종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짐을 느낀다던 어떤 이는 힐링이 필요해 이곳을 찾았다고 했으며, 어떤 이는 올레길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시린 겨울에도 꿋꿋이 피어나는 붉은 동백꽃은 강한 생명력과 영원한 사랑을 상징한다. 시뻘건 화마에 불타던 제주는 이제 사람들의 마음에 아름다운 동백꽃을 피워내는 강인한 섬이 되었다. 삶에 지쳐 바다를 건너오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평화의 섬’이 되었다. 깊은 아픔을 더 깊은 사랑으로 품은 존재만이 찬란한 빛을 낼 수 있음을 나는 제주를 통해 배웠다.
이곳에서 나 또한 깊은 아픔을 더 깊은 사랑으로 품고 찬란히 빛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