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일터 바다에는 퇴출이라는 게 없네
고무 옷 입고 납덩이 차고 쉐눈에 오리발 신고
브르릉 밭은 숨소리 오토바이 물질가네
여차하면 나발 불 듯 갯메꽃이 피었네
곶바당 바윗등 때리는 낮은 물결에
비단 필 풀어 놓고도 흔들리는 바다를 보네
약 한 첩 털어놓고 상군해녀 뒤따르네
수평선 불똥 튕기며 용접하는 이른 햇살
바다에 들기도 전에 숨소리 깊어지네
실에 꿴 오분자기 부실한 어미젖이었네
바다가 죽이고 바다가 살렸다는
결결이 푸른소리가 밀려왔다 밀려가네
고정한 제주해녀들 불문율이 검푸르네
할망바당 애기바당 밥그릇에 그은 선
위아래 확실한 바다 그 유산이 반짝이네
- 이애자 ‘할망바당’
내가 ‘할망바당’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지난 4월, 제주 남동쪽 작은 마을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에 묵을 때였다. 소박하고 편안한 미소로 나를 맞아준 사장님은 제주에 내려와 산 지 15년이 되었다고 했다. 내가 제주살이 일주일 차라고 이야기하자, 사장님은 따뜻한 수다쟁이 선배처럼 제주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그중 하나가 ‘할망바당’이었다.
할망바당은 ‘할머니 해녀들을 위한 바다’라는 의미이다. 해녀는 물질 기량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혹은 똥군), 이렇게 세 등급으로 나눈다고 한다. 등급에 따라 숨의 길이가 다르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 바다의 깊이도 다르다. 할망바당은 할머니 해녀들을 비롯해 하군에 속하는 해녀들만 들어갈 수 있는 비교적 얕은 바다이다. 예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온 제주의 해녀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깊은 바다에 들어가기 어려운 해녀들을 위해 만든 약속이다. 하지만 얕은 바다에는 물건(해산물)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상군, 중군 해녀들은 채집한 물건을 각자의 마음이 허락하는 만큼 자유로이 할망바당에 버리고 간다고 한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이 이야기를 하며 할망바당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겉보기에 투박하지만 속은 따뜻한 제주식 배려’라고. 위험하니 물질하지 말라며 돈이나 물건을 건네기보다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벌 수 있도록 얕은 바다를 내어주는 ‘진짜 배려’라고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내 어머니와의 일화가 떠올랐다.
나는 몇 년 전, 결혼과 동시에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했다. 처음으로 온전히 내 살림을 해보니 어머니 생각이 자주 났다. 방과 방을, 거실과 주방을 오가며 엉덩이 붙일 틈 없이 분주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았다. 요리 한두 가지를 하는 것조차 보통 일은 아니었다. 먼지는 왜 그리 빨리 쌓이고, 화장실 물때는 또 왜 그렇게 자꾸만 생기는지. 그제야 한 가정의 주부로, 두 딸의 어머니로 살아온 그녀의 세월이 보였다. 뒤꿈치엔 굳은살이 박이고, 뜨거운 냄비도 맨손으로 거뜬히 집을 수 있을 만큼 손가죽이 두꺼워진, 그런 세월이.
그 후로는 친정에 가면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에서, 바리바리 싸준 반찬에서 그 두꺼운 굳은살과 손가죽이 보였다. 가만히 앉아 밥을 받아먹는 것도, 공짜로 반찬을 얻어와 다 먹지 못하고 버리는 일도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그 마음을 고운 말로 전하는 일이 나는 늘 민망했다. 진심 대신 퉁명스러운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간만에 친정에 들러 식사를 하는 날, 어머니가 “밥 더 줄까? 과일 깎아줄까?” 물으면 배부른데 더 어떻게 먹느냐며 괜스레 핀잔을 늘어놓았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서는 내게 반찬을 싸주겠다 말하면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해 부담만 된다고 구시렁거리며 도망치듯 나왔다. 사실 그 안에 담긴 진짜 마음은, 어머니도 편히 식사하시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정성껏 싸주신 반찬을 다 먹지 못하고 버릴까 봐 드는 미안함이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어머니는 내게 무엇을 해주고 싶을 때마다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하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어 “장조림 하는 김에 너도 좀 주려고 하는데, 장조림은 냉동실에 넣어두고 조금씩 해동해서 먹으면 되니 오래 보관할 수 있어서 괜찮은데...”라는 식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배려랍시고 한 내 거절이 어쩐지 몇 배의 죄송스러움으로 되돌아왔다.
어머니는 그렇게 내 눈치를 보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했다. 깨소금을 볶아 나눠주고, 양파와 감자를 두세 개씩 나눠주고, 내가 좋아하는 수박을 먹기 좋게 깍둑썰기해서 가져다주었다. 어쩌다 내가 전화를 걸어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라고 얘기하면 어머니는 들뜬 목소리로 맛있게 끓여놓을 테니 편한 시간에 들르라고 했다. 그 후 친정에 가면 앞치마 차림으로 주걱을 든 채 주방에서 나온 어머니 얼굴에는 해당화 한 송이 핀 것처럼 해사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어머니가 정말 원하는 일은 사실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이제 고생스러운 내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내려놓고 편히 사세요.’가 아니라 ‘나는 아직 어머니가 필요해요.’라고 솔직히 말해드리는 것. 내 어머니로서의 그녀의 존재를 지켜주는 것 말이다.
제주의 해녀들은 보통 예닐곱 살부터 물질을 배우기 시작해 평생을 바다와 함께한다. 물질을 두고 ‘저승에서 돈 벌어 이승에서 쓴다’고 할 만큼 매 순간 목숨을 걸고 바다에 들어간다. 평생을 해녀로 살며 그 바다에서 동료를 잃고 가족을 잃었더라도, 다리에 허리에 철심을 박아둔 곳이 시큰거려도, 뭍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관절이 닳아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 해녀들은 물질을 하러 간다. 자식들은 어머니 걱정에 절대로 바다에 가시지 말라고 만류하지만 그래도 바다로 나간다. 해녀들은 바다를 친정이고 어머니라고 말한다. 물질을 동료 해녀들과 운동하고 노는 것이라고 말한다. 해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물숨’에서는 80대 할머니 해녀였던 어머니를 끝내 바다에서 잃은 딸의 시선으로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머니는 바다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시간 같은 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땅에서는 그저 병든 노인이었지만 바다에서 어머니는 바다의 여인, 해녀였다.
한 번에 숨을 3분이나 참으며 깊은 바다를 헤엄치던 상군 해녀도 나이가 들면 여지없이 하군 해녀가 된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젊은 시절, 각자의 인생에서 상군 또는 중군 해녀였더라도 나이가 들면 우리 모두 하군 해녀가 된다. 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들 것이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도 줄어들 것이다. 그때 우리 자신의 존재는 어떻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해 깊게 고민한다면 지금 노인이 된, 노인이 되어가는 우리네 부모님들을, 우리 사회의 노인들을 보는 눈도 달라지지 않을까. 진짜 배려는 위험을 차단한다는 명목 아래 세상과 단절시켜 그 존재마저 희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끝까지 자신으로서 자신의 바다에 존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아닐지. 할머니 해녀를 뭍에 잡아 두어 병든 노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바다의 여인, 해녀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할망바당’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