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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나를 담은, 나를 닮은 공간

by 은도

이른 아침 침실에 내려앉은 따스한 햇살에 눈을 뜨면, 옥빛과 푸른빛이 출렁이는 제주 바다가 유리창에 액자처럼 담긴다. 창을 열어젖히자 액자 속 그림이 비로소 현실로 다가온다. 시원한 파도 소리가 귀에 닿고 선선한 바닷바람이 뺨을 스치면 온 감각으로 내가 제주에 있음을 느낀다. 작은 단층집,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는 소박한 마당, 그 주위를 둘러싼 야트막한 돌담, 제주의 자연과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듯한 고즈넉한 집, 그런 집이 바로 나의 제주 집... 이 될 줄 알았다. 제주에 오기 전까지는.


[004].png [출처: 소못소랑 펜션]


작은 중고차 한가득 짐을 싣고 무턱대고 제주에 입성한 나는 그 짐을 받아줄 집부터 구해야 했다. 게스트하우스를 떠돌아다니며 여행하는 동안 마음에 드는 동네에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 정착할 요량이었다. 이왕이면 제주의 자연을 품은 집으로. 로망 가득 제주살이에 어울리는 완벽한 계획인 듯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너무 도시 사람이었고, 그런 내게 제주는 너무 날것의 자연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줄곧 도시에서 자랐다. 게다가 양가 친척 집 모두 자연과는 거리가 먼 도시의 아파트였다. 그런 내게 깔끄러운 흙과 거친 나무의 촉감은 늘 낯설었고 벌레와 곤충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집에서 작은 벌레라도 한 마리 발견하면 호랑이라도 만난 듯 호들갑을 떨어 가족들을 놀라게 하기 일쑤였다. 언젠가 한 번은 늦은 밤, 벌레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공포에 질려 몇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곤히 주무시는 부모님을 깨워 벌레를 잡아달라 부탁했다가 핀잔을 듣기도 했다.


[004] 돌담집.jpg 제주 상모리


제주에 도착한 날, 나는 부동산을 통해 집 두 곳을 구경했다. 한 곳은 시내에 있는 깔끔한 오피스텔이었고, 한 곳은 시내와 멀지 않으면서 바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원룸 빌라였다. 오피스텔은 가격, 청결 상태, 방범 등 모든 현실적인 조건이 좋았지만 제주의 자연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곳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원룸 빌라는 그나마 자연과 가깝지만 오피스텔보다는 덜 깨끗한 데다가 조금 외진 곳에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두 곳 모두 내 로망을 채워줄 예쁜 돌담집이 아니라는 사실도 마음에 걸려 조금 더 발품을 팔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에서는 집에 지네가 나오는 일은 일상이고 가끔 뱀도 출몰한다’, ‘해가 지고 밤이 되면 골목에 사나운 들개들이 득실득실하다’, ‘몇 년 전에는 태풍이 이웃집의 지붕을 통째로 날려서 마치 평면도처럼 집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였다’는 이야기들이었다. 벌레도, 들개도, 태풍도 두려웠던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은 바로 다음 날, 전에 보았던 오피스텔을 덜컥 계약하고 말았다. 로망이었던 제주 돌담집은 구경도 안 해 보고 말이다.


[004] 활엽수게하.jpg 제주 상모리


그렇게 갑자기 생긴 나의 집이 위치한 곳은 제주시의 번화가 중에서도 번화가인 연동이다. 차량 통행이 많은 왕복 4차선 도로 양옆으로는 호텔이 죽 늘어서 있다. 공항에서 차로 5분 거리인 이곳에서는 한국인보다 중국인,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 관광객들을 더 많이 마주친다. 주변 상점 간판과 유리창에는 온통 중국어와 일본어가 적혀 있어 마치 서울의 명동을 연상케 한다. 해가 진 후에는 인공 불빛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제주의 다른 동네와 달리 연동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수많은 간판 불빛이 화려한 밤 풍경을 이룬다. 그 불빛이 내 침실 창문을 통해 들어와 밤새 번쩍거리는 탓에 나는 매일 밤 블라인드를 내려 창문을 완전히 가린 후 잠을 청해야 한다. 그뿐인가. 서울처럼 주차난이 심각해서 골목골목 차들이 불법 주차되어 있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여유로운 드라이브는 집 주변을 한참 벗어나야 가능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입주 후 내 집이 생겼다는 기쁨을 느끼기는커녕 후회와 아쉬움만 가득했다. 집에 정이 붙지 않았다. 이럴 거면 그냥 서울에 살지 왜 제주까지 왔을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호기롭게 내려와서는 그깟 벌레, 태풍을 핑계로 왜 살아보지도 않고 포기해 버렸을까. 수없이 나를 질책하는 동안 제주살이에 대한 자신감마저 바닥이 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계약서에 도장을 쾅, 찍은 후 입주해 버렸고 나는 앞으로 그곳에 살아야 하는 것을.


대신 나는 나의 공간을 로망으로 가득 채우기로 했다. 제주에 있는 동안 짐을 최대한 늘리지 않는 것이 내가 정한 철칙이었으나, 로망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물품만은 마음껏 구입했다. 하얀 책장을 사서 조립하고 책들과 노트를 채워 창가에 두었다. 그 옆으로는 은은한 불빛을 내는 조명을 놓았다. 책장 앞에는 파란색 러그를 깔고, 그 위에 노란색 빈백 소파를 올려두었다. 밤이 깊어지면 차가운 형광등을 끄고 아늑한 스탠드 불빛을 밝힌다. 책장에 놓인 스피커를 통해 잔잔한 음악을 틀고 노란 소파에 앉아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는다. 가끔은 따뜻한 귤피차를 우려서 마시기도 하고, 가끔은 시원한 맥주를 마시기도 하며 나만의 공간에서 고독을 즐긴다.


아침에는 모자를 눌러쓰고 밖으로 나간다. 어느 날은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바닷가로, 어느 날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오름으로, 공원으로 아침 산책을 다녀온다. 오후가 되면 제주의 자연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가 밤이 되면 나의 공간에서 고요히 하루를 마무리한다.


[004].jpg


그렇게 내가 제주의 명동에 살면서도 제주의 자연과 로망을 즐기는 방법을 찾는 동안 집을 가득 채운 후회와 아쉬움은 창틈으로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나의 감성과 온기가 조금씩 더해졌다. 그리고 나는 인정하게 되었다. 자연이 낯설고 낯섦이 두려운 나는 아직 도시의 텁텁한 공기를 휘두르고 있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무거운 공기를 벗어던지고 제주의 자연이 주는 상쾌한 공기를 입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를 꼭 닮아 이방인 같은 이 집에 머무르며 조금씩 제주 생활에 적응해 보기로 했다. 조급해하지 말고, 탈이 나지 않게, 서서히 스며들도록. 나만의 방법으로,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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