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가을이 왔음은 단풍보다 억새가 먼저 알린다. 도롯가에, 오름에, 군락지에 빽빽하게 솟아오른 억새는 가을바람에 은빛 물결을 이루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제주에는 가을꽃도 흐드러지게 피었다. 메밀꽃, 코스모스, 들국화, 금잔화...... 그 화려함에 매료된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꽃을 배경으로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는다.
시린 겨울이 오기 전 형형색색 가을꽃이 주는 마지막 낭만, 하지만 어쩐지 나는 그 화려한 낭만에는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오히려 작고 소소한 생명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너무 하찮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나는 결코 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 기어이 피어난 것들을 사랑한다. 돌 틈에서 피어난 작은 꽃 한 송이, 작은 풀 한 줌. 삭막한 회색 아스팔트를 뚫고 피어난 민들레 한 송이. 무심히 길을 지나다 그런 것들을 발견하면 꼭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기쁘다. 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작고 기특한 그것들을 잠시 눈에 담는다. 여린 몸으로 강하게 뿜어내는 강인한 의지에 경이를 느낀다. 유독 척박하고 외로웠을 삶에 위로를 보낸다. 버티고 피우고 살아냄으로써 내게 주는 용기와 희망에 감사를 느낀다.
가끔 군중 속 고독을 느낄 때가 있다. 나만 빼고 모두 별일 없는 것 같을 때, 나만 빼고 모두 행복한 것 같을 때. 지나가는 새도, 기어가는 벌레도, 길가에 핀 꽃도 모두가 평온한데 오직 나만 불행하다고 느껴질 때. 그럴 때 나는 군중을 벗어나 홀로 고요히 앉아 마음에 간직해 둔 작고 기특한 생명* 하나를 꺼내 본다. 그 작은 몸이 건넨 위로를 곱씹으며 내게 가만히 전해준다.
‘보이지 않는 세상 곳곳에는 많은 이들이 각자의 삶을 홀로 견디고 있을 거야.’
‘불행을 견디며 피어난 삶은 더 아름다울 거야.’
‘돌 틈 사이 피어난 작은 생명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언젠가 너도 알아봐 줄 거야.’
아픔을, 고통을, 불행을 견뎌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는다. 내가 돌 틈을 비집고 피어난 작은 생명 앞에서 걸음을 멈추듯, 그런 아름다움은 서로를 알아보게 만든다고 믿는다. 각자의 삶을 묵묵히 견뎌온 그들은 어느 날 우연히 마주쳐, 서로를 알아보게 되리라고 믿는다. 서로에 대한 기특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잔잔한 위로를 건네리라 믿는다.
그러니 우리 모두 세상 밖으로 밀려나 오롯이 혼자인 것처럼 느껴질 때, 혼자서는 견뎌낼 힘도 용기도 없을 만큼 지칠 때, 그러나 나를 알아봐 줄 누군가가 있으리라는 희망조차 품을 수 없을 때, 그때 가만히 꺼내 볼 작고 기특한 생명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살면 좋겠다. 그렇게 견디다가 언젠가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아릿한 미소를 지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 '작고 기특한~'이라는 표현은 <'작고 기특한 불행', 오지윤>이라는 책 제목에서 차용한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