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꽃잎의 추억
어쩌다 메리골드 세 송이가 생겼다. 초여름부터 시작하여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긴 시간 동안 피어난다는 꽃이다. 겹겹이 쌓인 꽃잎은 그동안의 모든 햇빛을 그러모은 듯 빈틈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제아무리 개화기간이 긴 꽃이라 한들, 11월 중순에 노지에서 메리골드를 만나기는 어려운 일일게다. 당연히 하우스에서 키워진 녀석이겠지만, 향기는 노지에서 피어난 것처럼 아찔하다. 숨을 한껏 들이쉬면, 머릿속이 메리골드로 가득 채워지는 것만 같다. 불현듯 옛 기억이 꽃잎 틈바구니를 헤치고 불쑥 고개를 든다.
내 직업은 남들의 분쟁 한가운데 끼어있는 일이다. 업무상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툼 중이거나, 다른 사람들의 다툼에 관여하는 중이거나, 십중팔구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이든 한껏 예민하고, 날이 서 있다. 어쩔 수 없다. 간단하든 복잡하든, 크든 작든 누군가에게는 일생일대의 싸움이다. 각자의 무기가 감정이든, 기억이든, 법률이든, 그 밖의 어떤 것이든지, 한껏 무장하고 모인 사람들은 무척 심각하고 날카로울 수밖에.
그래서인지 처음엔 일상적인 하루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렸다. 틈만 나면 축 늘어지는 나를 보고, S선배는 매번 잔소리를 쏟고는 했다. "일과 너를 분리할 줄 알아야 해, 어떤 상황에서도 관찰자 시점을 유지해야 해, 마주치는 모든 상황에 그렇게 쉽게 너를 동화시켜선 안 돼."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었지만,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본심은 늘 한 가지였다. 그러니까 저는 그게 잘 안 된단 말이에요.
어느 날, 늦은 오후 나는 혼자 화장실에 숨어 훌쩍이고 있었다. 종일 시달린 두 발은 퉁퉁 부어올라, 구두는 벗어 내팽개친 채 맨발로 쭈그리고 앉아 울었다. 눈물이 마르고도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S선배가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청승 다 떨었으면 그만 나오지?"
따뜻한 관심은 찰나였고, 선배는 늘 그렇듯 잔소리를 한 바가지 쏟아냈다. "이래 가지고 앞으로 긴긴 세월 어떻게 일할래." 어쩌려고 그랬는지 나는 뾰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는 아무래도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 같아요." 선배는 욕이 튀어나오는 걸 겨우 참는다는 눈초리로 빈정거렸다. "이거 말고 네가 뭐 생각해 본 일이나 있고?" 나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불쑥 말했다. "꽃집이요. 저는 꽃집하고 싶어요."
그때에도 지금도, 가장 선망하는 직업은 단연코 플로리스트이다. 거창하게 멀리 갈 것도 없이, 아파트 후문 앞 꽃집 사장님을 볼 때마다 남몰래 혼자 탄식하곤 한다. 아, 좋겠다. 예쁜 것들에 둘러싸여서, 예쁜 것만 만들어내니 하루가 얼마나 산뜻할까. 찾아오는 사람들도 축하할 일이나 기념할 일이 생겨 한껏 들뜬 이들이니, 아마 꽃집 사장님은 만성 신경성 위염에 시달릴 일도 없을 거야. 온종일 기분 좋고 행복한 사람들만 만나는 직업이라니,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환상적이다.
(물론 꽃집 사장님들에게도 남모를 고충이 있을 것이다. 세상에 마냥 쉽고 좋기만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냥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만 판단한, 철딱서니 없을 만큼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생각일 뿐이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보면, 내 말 끝에 S선배는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존재를 바라보듯 못마땅한 시선으로 말없이 빤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을 견디며 왜 꽃집을 하고 싶은지 설명을 이어갈 용기는 차마 나지 않았다. 그냥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선배는 짧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장서 화장실을 떠났다.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아가며 생각했다. 어휴, 저 마귀할망구...
다음 날 아침, 내 책상 위에는 노란 가을 국화가 소복이 꽂힌 꽃병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꽃잎처럼 노란 포스트잇이 그 옆에 붙어 있었고, 거기엔 익숙한 필체가 휘갈겨져 있었다. "책상 위에 좋아하는 것들 갖다 놔. 위안이 될 거야. 그리고 잘 좀 해봐." S선배는 내가 꽃이 좋아서 꽃집을 열고 싶은 줄 알았나 보다. 촌스럽게 국화가 다 뭐야. 근데 왜 눈물이 차오르는지 몰라.
그 쪽지는 마귀할망구의 주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 내 책상에는 예쁜 것들이 하나씩 늘어갔다. 초록초록한 화분도 가져다 놓고, 이제는 종이 끄트머리가 노르스름 변색된 딸아이의 첫 그림편지도, 함께 열정을 불살랐던 동료들과의 사진도, 여행지에서 사 온 예쁜 엽서도 고이 꽂아 두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 보낸 하루하루가 벌써 십수 년이 쌓였다.
오늘은 메리골드와 함께하니 속절없이 자꾸 노란 꽃잎에 코를 대게 된다. 샛노란 향기 사이로 추억도 방울방울 떠오른다. 오랜만에 S 선배에게 연락이나 해봐야겠다. 전화를 걸어봐야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잔소리뿐일 줄 알지만, 어쩐지 그녀에게도 이 향기를 전해주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