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데려온 연말

연말 결산

by 은도

연말은 언제나 예기치 않게 훅 다가온다. 크리스마스라는 환상 속에 뭉게뭉게 떠다니다 보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연말에 현실로 툭, 떨어진다. 그제야 부랴부랴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연말 결산을 해 본다.


2025년은 내게 마음을 따라 흘러온 해였다. 마음을 따라 제주에 왔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글을 썼다. 마음에 드는 공간에서 일을 했고, 그날그날 마음이 가는 곳을 찾아다녔다.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해야만 하는 일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마음을 따라 시간을 보낸 유일한 해였다. 달콤할 줄만 알았던 그 시간은 때때로 쓸쓸했고, 자주 불안했고, 꽤 어두웠다. 그럼에도 그 모든 시간을 견뎌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길에서 만난 귀한 인연 덕분이다.


[002] 금등리 집.jpg 제주시 금등리


제주살이 초반, 나는 한 카페를 찾았다. 차분한 커피 향과 여유로운 공기가 감도는 그 공간이 마음에 들어, 그때부터 그곳의 구인 공고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렸다. 한 달의 기다림 끝에 나는 결국 그 공간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만났다.


연고가 없는 제주에서 마음 둘 곳 없던 내가 이곳에 정을 붙이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들 덕분이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나는 인간에 대한 회의감과 관계의 피로감에 젖어있었다. 혼자이기를 택한 것도, 혼자 지낼 공간을 제주의 자연으로 정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그저 공간이 마음에 들어 찾아간 일터에서 만난 동료들은 따뜻하고 다정했다. 실수투성이인 나를 오히려 다독이며 너그럽게 대해주었다. 맛있는 것을 나눠 먹고, 유독 힘든 날이면 서로에게 힘을 불어넣고, 가끔은 술 한 잔 기울이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서서히 인간에 대한 정을 회복해 갔다.


마음길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은 또 있다. 함께 글을 쓰고 나누는 사람들, 그리고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이다. 얼굴도, 어떤 이들은 이름도 모르지만 그들은 그 누구보다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그 인연들 덕에 나는 마음에 담아두었던, 내 안에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이야기들을 조금씩 꺼내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꺼낸 이야기들은 때로는 나를 더 깊은 우물로 끄집어 내렸고, 울게 했고, 다시 천천히 올라와 살게 했다. 이만큼 시간을 건너와 그때를 돌아보니, 이제 알 것 같다. 그 시간은 마음을 회복하는 과정이었고, 성숙해지는 과정이었다.


[002] 한담 일몰.jpg 제주시 애월리


오롯이 혼자이고 싶어 찾아온 제주, 연말에 이르러 돌이켜보면 지난 9개월은 온통 사람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시간을 돌아보며 깨달은 것은 사람에게 상처받고 관계에 지치더라도, 결국 사람으로부터 치유받고 관계 속에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혼자 걷던 길 위에서 문득 누군가가 건넨 마음 한 조각이 내게 온기를 불어넣고, 그 온기가 모여 나를 연말까지 데려왔다. 혼자서는 결코 닿을 수 없었을 연말이다. 지난날, 지쳐있던 내게 불현듯 다가와 마음 한 조각의 온기를 건넨 이들에게, 내 손을 잡고 연말까지 함께 건너와 준 모든 인연들에 깊은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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