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역 교육청에서 간혹 대학으로 파견 오는 직원이 있다. 1~2년 정도 근무하고 돌아가는데, 어느 한 분의 연락이 왔다. 수십 년 전 나의 초임 학교에 후임이었다고 했다. 내가 주고 간 업무 노트가 자신의 초임 업무에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그곳의 명암이 살아났다.
출산율이 100만 명이던 세대, 나는 초등학교 5학년까지 이부제 수업을 했다.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서 등교하는 수업이다. 중고등학교 때도 한 반에 학생이 5~60명이었고 한 학년은 10개 반이 넘었다. 인근 지역대학 진학도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대학을 졸업하면 자연스럽게 다양한 종류의 공무원으로 갔다. 나도 교육행정직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시작했다.
광역 교육청에서 공개 채용을 시작하고 5기였다. 소규모 학교에도 행정 인력을 배치할 즈음이었다. 2달여 신임 교육 후에 '서무책임자'라는 이름으로 발령받았다. 동기들이 울산 통영 거제 쪽의 신설 초등학교에 많이 갈 때 나는 고등학교에 발령 났다. 줄도 빽도 없던 내게 그런 기회가 와 얼떨떨했다. 발령 시점의 성적순이라고 했으나 긴장과 기쁨은 잠시였다. 세상은 참 혹독했다. 준비된 것도 아는 것도 없었기에, 그대로 얻어맞고 치이며 3년여를 부유했다. 내 첫 부임지는 남쪽 바닷가를 접한 모 도시의 고등학교 행정실이었다.
'서무실'이라고 불리던 그곳에 직원이 5~6명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홀로 '서무책임자'로 가는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을 배우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부대끼며 배우는 일이 더 큰 일임은 가서 알게 됐다. 발령받으면 신고식을 해야 하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일을 하나 인계받으면 밥을 사야 하는 것을 차라리 누구라도 말해줬으면 좋았을 것이다.
'교무실' 38명의 교사가 모두 나의 모교 출신이라 미안할 정도로 찾아왔다. '서무실'의 누구도 대학 나온 사람이 없던 시절이었다. 업무에 흰 백지인 나를 일일이 가르쳐 주어야 하니 이유 없이 미웠을 것이다. 제대로 된 업무를 주지 않았다. 정규직 차석이라지만 1년여 가까이 민원업무와 공문서 수발만 시켰다. 해야 하는 업무를 배운 것은 그 당시 노년의 6급 서무과장이 바뀌고야 가능했는데 두 번째 서무과장이 오고서도 큰 변화는 없었다. 그래도 그 학교에 3년을 근무했다.
서무과장이 바뀐 2년 차부터 그나마 차츰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다. 댓 살 작은 여직원이 두 명 있었는데 인근의 여상을 나와 특채로 채용되었다고 했다. 한 명은 시의 고위직 딸로 발전기금을 냈다고 했고, 한 명은 학교 부지의 주인 딸이었다는 후문이 있었다. 그랬거나 말거나, 서무과장이 차별을 하든 말든 우린 어울리며 일했다. 주어지는 대로 열심히 살았다.
어느 해 8월 여름방학 중에 전 직원이 페인트 칠에 동원되었다. 복도와 교실 앞뒤 좌우 4면을 칠하기 위하여 바닥에 장판을 깔고 옮겨가며 페인트 칠을 했다. 그 당시 육성회 상용직원 주사님이 긴 막대 로라로 벽 한가운데를 두세 번 칠하면 우리 여직원 세명은 붓으로 모서리 여백을 채웠다. 간혹은 넓은 벽도 칠했다.
3년 차에 타 학교로 발령 나기 전, 나 대신 차석 업무를 하던 기능직 공무원에게 업무를 좀 가르쳐주십사 청했다. 어느 학교에 가든 일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몰랐으니 말이다. 커다란 서류철을 보여주며 공부하라고 했다. 분명 전 직원이 도색을 했는데 서류는 달랐다. 서류를 보여준 연세가 꽤 되었던 그분의 얼굴은 거의 핏빛이었다.
서무과장의 얼굴도 한 번 보았어야 했는데 도리어 내가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것만도 고마워서 서류에 코를 박고 들여다만 봤다. 오랜 시간 내 행동을 되새겼고 비겁했던 것 같아서 힘들었다. 묻지 않아도 그들은 창피했을 것이다. 그저 나를 다독인 말은 그들처럼 불쌍한 사람이 되진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이후 중고등학교와 교육청을 거치고 20여 년 전 대학으로 넘어왔다. 초임지에서의 기억은 혐오스럽기도 했지만 오래도록 내 생활에 거울이 됐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나이 듦이 곧 바른 어른, 성인이 되는 줄 알았던 기대는 사회 초반에 깨졌다. 그 이후로 줄곧 품었던 숙제는 '바른 어른'이었다. 그 학교를 떠나온 뒤에 전해준 업무 노트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을 줄은 몰랐다. 그런 사람이라도 만나니 작은 위안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