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단 위에 앉은 외부인사들 사이에 현 총장 옆자리에 앉으셨다. 1m 80이 넘는 그 어르신은 대학시절 나의 은사님이다. 복도에서 달려가 인사할 때도 반갑게 악수하며 마주 볼 때도 몰랐다. 흰 머리칼이 많았다. 모교 총장을 거쳐 타 대학 총장을 8여 년 했으니 총장 직함이 더 익숙할 텐데 나는 '교수님~' 하면서 달려가 인사했다. 대학 연구실에서 뵌 교수님은 늘 부모님 같은 은사님이다.
졸업식이 시작되고 애국가를 한 소절 부르는데 연단에 오른 무수한 보직교수들 사이에 서 계신 교수님을 보니 문득 목이 메었다. 내 얼굴의 잡티만 생각하고 며칠 전부터 일정을 수소문하다가 겨우 총장실 앞에 가서 기다렸는데, 우리가 좀 더 젊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는데, 교수님의 나이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졸업생들에게 들려주는 '격려사'를 하셨다. '현재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라'란 말씀과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라'는 두 가지를 주문하셨다. 그리고 본인이 기탁한 '예봉 최우수 연구상'을 수여하셨다.
한때 우리도 새내기던 때가 있었다. 88 꿈나무라고 칭해주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꼭 한번 지나온 고3 시절은 어찌 그렇게 온 나라가 우리를 주인공으로 대우해 주던지 황공했다. 여름이면 수험생에게 좋은 음식이 기사로 떴고 수능시험 당일에는 늦은 애들을 경찰 오토바이가 태워다 주는 일들이 뉴스를 타기도 했다. 분명 나는 조금 헐렁한 수험생이었나 보다. 입시지옥이라 하는데 그런 기억들은 나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이 내 사는 도시에 있었고 종합대학이었고 국립대학이어서 다행이었다. 없는 집에서 그나마 대학을 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첫 학기 이후부터 등록금이 걱정이었다. 그 당시에는 학생들의 아르바이트가 쉽지 않았다. 알바도 없던 시절, 학내에 '근로장학생'이라는 제도가 있다고 한 해 먼저 입학한 언니가 일러주었다.
그 신청을 지도교수님에게 가서 말해야 한다고 했다. 입학도 하지 않은 이맘때쯤이 아니었을까.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엉뚱하게도 옆 단과대학 건물이었다. 학과를 신설해 놓고 그 학과가 속한 단대로 발령도 받지 못한 채 기존 연구실에서 '유전공학연구소장'을 하고 계셨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학과사무실도 생기고 옮기셨지만, 그렇게 찾아간 대학 연구실은 정말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거기서 말했다. 이번에 무슨 학과 신입생 누구라고, '근로장학생'을 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그것이 첫 대면이었다.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하신 분이었고, 생화학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손가락 안에 든다는 분이 지도교수님이셨다. 학과를 신설하고 처음으로 우리 동기 40여 명이 입학하였으니 에피소드가 많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학과조교 언니로부터 전갈이 왔었다. 교수님이 나를 부르신다 했다.
이번에는 공부하던 단과대학의 5층에 있는 교수님 연구실로 갔다. '니 근로장학생 하고 싶다 했재'였다. 도서관에 책을 정리하는 자리가 하나 있다고. 세상에! 그때는 4학년 1학기였다. 지금은 취업공부를 해야 해서 근로를 할 수가 없다고 여러 번 꾸벅거리고 나왔다. 그 바쁘신 분이 아니 몇 년 전에 이야기한 것을 아직도 기억하다니. 감동이었다. 그 일은 참 많은 것을 배우게 해 준 사건이었다.
아마 30대 초반쯤이었을까. 모교에 총장님이 되신 후에 대학 홈페이지에 들어가 교수님의 이력을 보았었다. 두 페이지가 넘는 그 이력들을 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그 후로 늘 나태해지는 순간이면 나는 우리 지도교수님을 생각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할 수가 있나 싶었고 그때도 그 연세에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하시는데 나는 도대체 뭘 하는가 싶었다. 아마 늘 종종거리고 뭔가를 하게 만든 원동력은 우리 교수님 덕분일 것이다.
대학 초년생 무렵 학내 서클을 가입해도 타임이나 KT(코리안타임) 같은 곳을 들라 하셨는데 나는 그 말씀을 꼭 따라 했으니 학생 때도 교수님 팬이었던가 보다. 많은 석박사를 배출하고 제자들이 세계적인 대학 교수뿐 아니라 국내 대학에도 수두룩 하지만 이공계열을 나와서 나는 공무원을 한다. 그래서 제자들 중에 '돌콩'인 셈이지만 그래도 우리 교수님의 영향은 나 역시 많이 받은 셈이다.
오래전부터 외던 바람이 하나 있다. 일들을 내려놓고 나오실 때 세상사람들이 많이 안 찾으실 때 그때쯤에는 내가 가서 맛있는 밥이라도 한 그릇 대접하고 싶다는 소망이다. 아직 서울에서 생활하시고 우리 교수님은 오늘 모교에 와서도 일정이 바쁘셨다. 아쉽지만 귀한 걸음 감사했고 또 뵐날을 꼽는다. 머리색이 하얀 것은 교수님의 열정에 아무런 영향도 없을 것이다. 교수님을 보면서 또 한 번 마음을 가다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