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학산 자락에 앉은 '연암도서관'을 찾았다. LG 구인회 회장이 진주성 내에 처음 지은 것을 여기로 이전한 것이 1985년이다. 그러니까 어릴 적 살았던 우리 동네 뒷산으로 옮겨온 것이다. 휴가를 얻어 평일 낮에 처음으로 옛 동네에 왔다. 제법 높은 지대여서 뜰에 서면 남강의 물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현관 입구에 구인회 회장의 흉상이 있었다. 문득 그분의 뜻이 정말 잘 녹아든 게 아닌가 싶었다. 직접 보았다면 무척이나 흐뭇했을 풍경이었다. 편리해진 책걸상과 많은 책이 아늑하게 동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었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뭔가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근무했던 부서들 중에 여기 연암도서관 같았던 곳이 있었던가 생각해 봤다. 직장과 조직이 뭔가를 배우고 싶게 만들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준 적이 있었던가. 한 때가 떠올랐다. 십여 년도 전 단과대학에 발령받았을 때다. 일을 시작하고거의 20여 년이 된 시점이다. 아이들이 좀 자랐고 중간관리자가 되어 발령받던 무렵이다.
6개 학과로 구성된 그 단과대학 행정실 팀장으로 갔을 때 많이들 우려했다. 일보다는 교수들이 더 어려울 것이라고 했는데 그때가 나에게는 르네상스 시기였다. 소속 특수대학원에 진학하여 야간 수업을 들었고 학내동료들과 독서모임도 했던 때다. 까다롭기로 소문났던 학장님도 그저 학자셨다.
학장으로 참석하는 대학 내 최고 의사결정 기구에서 최소한 기록하고 녹취하는 체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신 분이다. 이후로 그런 시스템이 자리 잡았다. 대학 본부에서 심의하여 배정한 단과대학 예산을 다시 학과별로 세분해서 학과장회의에서 설명했다. 물론 그 회의 자료는 우리 단과대학만 만들었기에새로운 일도 많이 했다.
적었던 업무추진비도 단대 홈페이지에 사용내역을 공개했는데 우리 단대가 거의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그 당시 단과대학 자체 월례회의를 정례화 한 분이다. 그 일도 우리 단대가 유일했다. 그러한 일들이 맞다는 생각을 했고 그 학장님은 '아 정말 학자시구나!' 싶었다. 학무회의를 마치면 당일 회의 자료를 정리하여 학과장 조교 행정실 직원 모두에게 공유했는데 그 발송시간이 한밤중이었다. 이제는 은퇴하셨지만 힘들어도 늘 정도를 가고자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단과대학이었기에 일하며 뭔가 배우고 공부하는 게 재미있었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니 그때가 사람들과의 교류가 가장많았다. 매 순간이 그때 같은 시절이된다면 이런 도서관에도 자주 오게 될 것이다.삶에 끝없이 질문하고 뭔가를찾고 또 책을 찾아서 말이다.
우리 뒷산에 도서관이 선다는 소문을 듣고 산길을 올라보고, 손꼽아 가며 숲을 바라보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가고 또 떠난 어른들이지만 도서관을 세운 분과 생활 속에서 꼿꼿함을 실천한그 학장님을 생각해 본다. 자세히 보면 의외로 주위엔 자기의 위치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베푸는 사람이 많다. LG 구인회 회장님이나 전직 사회대 학장 같은 사람들처럼 누군가의 삶이 윤택하기를 지원하고 바라는 사람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