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 - 소위 에세이를 읽고 -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사과입니다. 초 가을에 나오는 아오리부터 껍질째 먹는 홍옥과 홍로도 있지요. 달고 향이 오래가는 사과로는 단연 부사입니다. 소위 작가님이 말하는 부사는 이 사과의 부사가 아닌 거 아시지요? 동사 명사 형용사 부사 그 부사를 말합니다. 사용하면서도 단어가 같은 줄 몰랐어요. 문장에서 '부사'는 어쩌면 사과 중의 그 부사 같은 맛이 아닐까 합니다. 생략해도 되지만 제 위치에 잘 쓰면 풍성하고 향기롭고 감칠맛이 납니다.
우연하게도 제 필명이 사과꽃이고 프로필 사진도 사과 그림이에요. 어쩌면 이 책은 2번의 리뷰가 필연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껴보다가 드디어 완독 했습니다. 신나게 줄 치고 메모하면서 봤지요. 뭉클하고 절절하고 애틋하다가 동의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덮었습니다. 하나 생각이 조금 달랐던 부분도 있었어요. 그건 뒤에 말하기로 하고 우선 기억에 남았던 부사 3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언제나'와 '솔직히'와' '아직'입니다.
작가가 말하는 '언제나'를 읽는데 내 모습이 내려다 보였습니다. 심리학 책이나 명상 관련 책, 자기 개발서를 포함하여 그렇게 찾아 헤맸던 건, 그래서 기르고 싶었던 건 홀로서기였습니다. 홀로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찾고자 브런치에 글을 쓰기도 했지요. 말을 잘하지도 못하면서 사람들 속에서 말하고 싶어 하는 나를 발견하는 놀라움만큼이나 혼자인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컸던 것 같습니다. 작가의 글 '언제나, 내 곁엔 내가 있다는 걸'을 읽는데 문득 알았어요. 혼자가 아니었던 거지요.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는 나의 든든한 지지자는 나였습니다. 애타게 찾을 필요도 없고 홀로 서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는 자각, 내 모습이 예뻤습니다. 뭐든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아졌습니다.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 힘이 한 편의 글을 보면서 생겼습니다.
2번째 가슴에 남은 부사는 '솔직히'입니다. 정곡이 콕 찔렸습니다.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 같고 보여줄 수 없는 진정성을 호소하고 싶어서 자주 써왔던 말이었거든요. 그러면 진솔하게 보이고 이해를 잘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나름의 계산이었어요. 작가는 말합니다. '솔직히, '함부로'가 될 수도 있잖아요?'라고. 솔직히라는 말에 묻혀 너무 쉽게 전하는 말과 행동이 '함부로'가 될 수 있으니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솔직함이 주는 후련함보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 인내가 주는 뿌듯함이 훨씬 더 가치 있다'(P182)고 말합니다. 이제는 솔직히라는 부사를 말하고 뒤에 숨어서 이해를 구하지 않으려고요. 좀 더 자세히 신중하게 말하고 때로는 말을 참기도 하면서 뜻을 전하려 합니다.
제게 남은 3번째 부사가 궁금하시나요? '아직'입니다. 작가는 묻습니다. '아직, 망설이고만 있나요?'라고. 마치 지금 혼자 무언가 추진하고 있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도전을 가볍게 '시도' 정도로만 생각해도 인생의 1도를 바꾸는데 충분하다고, 어떤 일이든 한달음에 이룰 수는 없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진짜 좋은 때란 마음에 파동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이라고, '아직'이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고, 용기를 내는 것부터가 변화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이 글제에 등장하는 책을 빌려 왔습니다. '더 해빙' '역행자'를 다시 찬찬히 보려 합니다. 긴 날동안 망설이고만 있었는데 그런지가 10여 년이 넘었더라고요. 아직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기에 가을학기부터 대학원에 진학합니다. '아직'은 저를 위한 글제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의 생각과 조금 달랐던 부분 이야기입니다. '기어이'에 대한 소회입니다. '기어이 해내는 사람보다는 꾸준히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작가님의 말에 공감합니다. '그렇게까지 비장해지고 싶지는 않다'는 말씀도 이해하지요. 다만 저는 늘 비장해지고 싶어 했더라고요. 꾸준히 하지도 못하면서 지나치게 비장했던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습니다. 마음만 그러했는지 모르지만 스스로를 늘 무겁게 비장함으로 짓눌렀던 건 살아온 삶이 그리 편치 않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무게감, 부채감, 책임감 그런 단어를 이고 지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깨달았으니 이제 그런 나를 좀 내려놓으려 합니다. '기어이'라는 단어를 놓고 비장해지는 마음에서 홀가분해지고 싶습니다.
여러 작가님들이 댓글에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책의 모든 부분을 필사하고 싶다고. 정성 들여 깎아놓은 조각처럼 저도 문장에서 우리말의 세련됨을 느꼈습니다. 저도 보았던 책을 인용할 때는 훨씬 더 공감이 잘됐습니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는 책('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류시화 옮김)'로 재출간)을 말할 땐 무척 반가웠지요. 책은, 글은 이렇게 사람을 가깝게 해 줍니다. 작가도, 댓글을 주고받는 글 벗님들도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집니다. 처음 리뷰를 쓰면서 '이 책 보셨나요?'라고 제목을 달았다가, '부사가 좋은 삶을 찾다'로 바꾸었지요. 이런 책을 찾았다는 환호입니다.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는 제목에 혹시 작가가 담고 싶은 뜻이 있었을까요?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는 '부사가 있는 삶이다'라는 뜻인지, 삶에서 부사는 무엇일지, '무엇하나 버릴 게 없는 삶'이라는 뜻인지 자꾸 더 생각하게 됩니다. 저녁날씨가 여름 초입인데도 싸합니다. 상쾌하기도 하고요. 부사와 어우러지는 삶의 이야기가 부사향 같이 달콤 새콤했습니다. 귀한 이야기 들려줘서 고마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