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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녀의 낯 꽃이 환했으면

'새의 선물' - 은희경 장편 소설(1995)을 읽고 -

by 사과꽃


난 날도 24시간이었을 테고 살아오는 내내 해가 뜨고 지는 하루는 24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지난날의 하루와 지금 맞는 하루가 정말 달리 느껴져 신기할 정도다. 분명 똑같은 시간인데, 20대 때 보고 들은 느낌과 30대 때가 다르고 40대와 50대의 느낌이 또 다르다. 상황과 환경이 주는 영향은 그렇게 크다. 언제나 고른 시간대가 주어진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면 하루를 사는데 조금 유연한 시각을 가질 수 있을까?



은희경 님의 '새의 눈물'을 보면서 그 시간이라는 차이를 더 실감했다. 1960년대라는 시대 배경 속으로 다녀왔다. 처음에는 계속 읽어야 할지 갈등했고, 너무 어둡고 힘든 이야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는데 어느새 다 읽고 말았다. 솔솔 풀어가는 이야기는 그 시절을 상상하며 주인공을 따라가게 한다. 초반에 옮겨 본 단어가 '낯 꽃'이다.



12세의 소녀가 1970년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할머니집에서 겪는 한 동네 이야기다. 불우한 환경 탓에 성격이 어두울 법도 하건만 무난하게 성장해 가는 소녀가 이야기를 풀어간다. 작가는 얼굴을 낯 꽃이라고 했다. 소녀와 소녀의 이모 그리고 외할머니, 경자 혜자 세 들어 사는 장군이 엄마 등등 유독 여자 주인공이 많다. 국민학생인 소녀의 시각인데 툭툭 던지는 문장들을 어느 틈엔가 돌아가서 다시 읽고 있었다.



'삶이 내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거나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라는 말. '기적이란 건 없다. 그러나 우연은 많다'라는 말까지. 지금은 아주 생소해진 단어들도 나왔다. '방학계획표'를 짰다는 주인공의 말이나 이모를 좋아하는 깡패로 나오는 홍기웅을 설명할 때 '순정'이라는 설명도 오랜만에 보는 단어다. '낯 꽃'도 적어두고 '방학계획표'도 적어두고 '순정'이라는 말도 적어놨다.



12세 소녀답지 않게 벌써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나'를 분리하는 구도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건 순전히 작가의 의도겠으나, 소녀의 시각으로 하는 말임에도 필사하고 싶은 문장이 많다. '세상을 서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상처받게 마련이다.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 따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서정성 자체가 고통에 대한 면역력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라는 말과 '과거의 감정에 대해 진의를 알고 싶어 하는 것 자체가 헛된 미련'이라는 표현이 자칫 염세적으로 보일법 하면서도 맞는 말이었다.



1960년대의 시골 마을, 전화기가 귀했고 TV를 마당에 내 걸면 마당 가운데는 동네 어른들이 와 앉고 아이들이 주위에 둘러 서서 보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시절을 산 유년의 기억도 나고 엄마 외할머니 세대를 떠올리며 반전을 거듭하는 재미에 푹 빠져서 어느 틈엔가 소설 끝까지 따라갔다. 작은 글자체에 익숙해지느라 초점이 희미해지는 난독을 겪었지만 더 이상 읽어낼 분량이 없어서 서운해지기까지 하다. 다만 12살의 주인공 소녀가 이제는 환한 얼굴이 되었기를, 이모의 낮 꽃 역시 밝아졌으면 하는 소망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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