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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움은 기억해 주는 것

by 사과꽃


콩나물을 씻어서 커다란 볼에 물을 조금 깔고 앉힌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보라색 가지를 도마에 놓고 동강동강 썬다. 보라 껍질을 베고누운 하얀 속살이 드러나게 콩나물 위에 가지런히 놓는다. 김이 올라오면 가지와 콩나물을 채에 덜어 식힌다. 신선한 가지랑 콩나물이 맛있게 익었다.


새송이 버섯의 커다란 목을 한 손으로 싸안고 상대 쪽 손바닥으로 갓을 문지르며 흐르는 물에 씻는다. 통통한 밑동도 깨끗하게 씻어서 도마에 놓고 또각또각 넓게 채 썬다. 오늘은 새송이도 데쳐서 물기를 짜고 나물을 할 참이다.


꽈리고추 두 봉지를 쏟아 꼭지를 따고 물에 여러 번 헹군 뒤 담가둔다. 농약을 많이 쓴다는 채소는 물에 우려내는 나름의 비법이다. 마른 볼에 부침가루를 넣고 10여분 우려낸 꽈리고추를 굴러 찜통에 쪄낸다. 풋고추 익는 향은 달큼하다. 양념장에 잘 둥글려 내면 밥도둑이다.


부추도 생 겉절이를 하고 깻잎지도 할 참이다. 부추 2 봉지에 깻잎 5 봉지를 사 왔다. 마음껏 씻을 수 있어서 좋지만 채소는 씻는데 정성의 절반이 더 들어간다. 양파 당근을 곱게 채 썰고 마늘 대파 홍고추 청고추를 다진다. 진간장 멸치액젓에 매실액 설탕을 섞어서 고춧가루를 풀어 섞는다. 여기에 채 치고 다진 재료를 넣고 깨소금을 넣으면 꽈리고추 무침, 부추겉절이, 깻잎지 양념으로 완성이다.


나물을 무칠 차례다. 양념은 맑은 멸치액젓과 매실액 깨소금이 전부다. 참기름은 비빔밥을 먹을 때 추가하고 고춧가루도 기호에 따라 넣는다. 찬 통에 담을 나물은 콩나물만 고춧가루를 넣고 가지와 새송이버섯은 담백하게 무쳤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틈틈이 만든 채소 찬이다. 이번에는 제법 양을 많이 했다. 큰 수술을 하고 내려온 형님이 한 손을 못 쓴다 하여 반찬을 만들었다.


제 피붙이가 많아서 밑반찬은 많은데 나물찬이 없다 했다. 사실 컨디션 회복 기폭제 역할을 채소가 하는 건 잘 모를 테다. 정성껏 담은 찬을 한 가방 싸고 봉투를 하나 넣어서 보냈다. 방문도 저어하여 남편들 손을 통했다. 큰 형수를 따랐던 신랑은 기분 좋게 들고 갔다. 문 앞에 두었던 토마토 한 소쿠리를 깜빡 잊은 채 가서 두 소쿠리를 다 먹어야 할 판이다.




사는 게 뭔지 어찌 살아야 하는지 잴 줄도 모르고 살아만 낸 것 같은 젊은 날이 있었다. 큰 아이가 태어날 즈음 친정 엄마는 몸이 좋지 않았고 시모도 일을 하셨기에 남의 손을 빌려 키웠을 텐데 막내아들이 명퇴 즈음이라 도와주고 싶었던가. 시부모의 요구로 착하던 형님이 우리 아이를 돌봐주셨다. 출산휴가 2개월을 마치고 출근하면서 아침에 맡기고 저녁에 되찾는 육아를 했다. 아이는 시가로 형님네로 전전하여 찾아다녔다.


두 돌도 되기 전에 동네 어린이집에 등록을 한 것도 큰 형님이었다. 제 키만 한 가방을 메고 온 아이를 보며 울진 않았지만 마른눈에도 마른 가슴에도 눈물이 있음을 그때 배웠다. 낮 시간 내내 돌봄이 힘들어서라고 그래서 일찍 등록이 필요했을 거라고 이해했다. 그런 아이가 쑥쑥 자라 공부도 잘하고 좋은 직장에 가서 형님도 좋을 것이다. 동서가 가까이 살고 있으니 위로가 될까. 그 시절 넉넉하게 육아비를 주진 못했으나 기회가 되면 마음을 썼다.


몰랐는데 30대 그때, 참 울고 싶은 순간이 많았는데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울고 있을 겨를이 없었고 아직 울면 안 될 때라고 여겼나 보다. 다 살아내고, 뭔가 이루어 놓고 그때 울어도 늦지 않을 거라 여긴 것이다. 늘 바빴다. 살림하면서 아이 둘 키우면서 친정부모님 시부모님의 병환 때마다 갈피를 못 잡고 종종거렸다. 그 속에서 잘 커준 아이들, 작은 거둠일지라도 손 보태준 이들이 많았기에 오늘이 왔으리라.


할 수 있는 거라곤 틈 날 때마다 정성껏 밥하고 찬을 만든다. 젊던 날, 갑자기 시부모님이 방문해도 밥을 차려 낼 정도로 냉동실과 냉장실에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찬을 나르진 않았는데 살다 보니 이제는 찬통에 담아서 나를 날도 오는 것 같다. 동생에게 간혹 싸주고 김장 때나 싸주던 찬을 어쩌면 이제 간간이 나누면서 살게 될 것 같다. 큰 고마움은 단번에 돈으로 갚아지는 게 아니기에, 오래오래 기억하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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