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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꽃 Mar 09. 2023

소설의 묘미는 생뚱한 깨달음이다

하루키 소설  '일인칭 단수'


사이즈가 작아 좋았다. 몇 편의  단편을 묶어 놓아 가방에 넣어 다니기 좋았고 어디서든 쉬 꺼내 읽기 좋았다. 장거리 여행에도 짐 속에 넣어가기 쉬웠는데 그러다 보니 그곳에 놓고 오기도 쉬웠다. 한 달여 만에 되찾아 챙겨 온 하루키의 소설  '일인칭 단수'를 내려오는 차 안에서 지는 해가 글자를 숨길 때까지 보았다.  


역시 소설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끊임없이 나의 생각을 끄집어 내게 한다. "세상에, 아니 그럼 나는 도대체 무얼 했지." 읽던 내용과는 무관하게 뚱딴지같은 생각이 들어 서먹해진다. 그렇게 된 것은 하루키의 단편 '위드 더 비틀스'의 한 대목을 보면서였다.


스쳐가는 말하나 행동이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고 어떤 일의 계기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생사에도 영향을 기칠 수 있다는 생각은 뒤통수가 서늘해지게 했다. 누군가의 행동이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담은 소설은 읽는 사람의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든다. 


. 그녀는 내 귓속에 있는 특별한 종을 울려주지는 못했다. 아무리 귀 기울여도 종소리는 끝까지 들리지 않았다. 
. 어차피 내 힘으로는 동생의 목숨을 구할 수 없었을지 모르지만, 뭐라도 조금이나마 알아줄 수는 있었을 텐데. 그 애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무언가를 말이야. 
. 사요코는 자네를 제일 좋아했지 싶어.( p 117. 위드 더 비틀스. 무라카미 하루키)


남들보다 더 섬세하고 더 예민하면서도 주위 사람들을 콘크리트나 나무토막처럼 여기진 않았는지. 

상대방의 입장을 거의 모르거나 무시하고 제 살기만 급급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 무심코 해온 말이나 행동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크림'이라는 제목의 단편을 보면서 "빵 속에 들어가는 달콤한 크림을 이야기하나? 커피 위에 올리는 휘핑크림을 이야기하는가" 의문을 가지면서 읽었다. '시간이 지나고 멀찌감치 물러나 바라보니 인생의 크림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인생의 크림'은 그럼 뭘까 싶었다. '설명도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지만 마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은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라는 말에 밑줄을 그었다. 

. 이 세상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치고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는가
그래도 말이야, 시간을 쏟고 공을 들여 그 간단치 않은 일을 이루어내고 나면,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
. 시간이 지나고 멀찌감치 물러나 바라보니...  인생의 크림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라고.
.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크림. 무라카미 하루키)


잊혔던 추억 속에 두 여인을 떠올리며 시작하는 단편 '사육제'는 남자들이 여성의 미모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유명한 작가가 그리는 여성의 외모에 대한 글이기에 더 궁금했다. 

작가에게 어느 날 문득 떠오르는 기억은 '멀고 긴 통로를 지나 어느 날 찾아와서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마음을 흔든'단다. '가을 끄트머리의 밤바람처럼'인데 그 '밤바람은 숲의 나뭇잎을 휘감아 올리고 억새밭을 한꺼번에 눕혀버리고 집집의 문을 거세게 두드린'단다. 

추함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의 강한 개성, 흡인력
그 기억들은 어느 날, 아마도 멀고 긴 통로를 지나,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온다. 그리고 내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흔든다. 숲의 나뭇잎을 휘감아 올리고, 억새밭을 한꺼번에 눕혀버리고, 집집의 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지나가는 가을 끄트머리의 밤바람처럼. (사육제. 무라카미 하루키)


8편의 단편을 묶어 제목으로 내세운 마지막 단편이 '일인칭 단수'다. 솔직히 어려웠다. 다 읽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게 또 소설의 묘미겠지. 다 읽고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

고급진 옷을 사서 넥타이에 신발까지 갖춰 입고 멋진 카페에서 보드카를 마시며 책을 읽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 주인공은 카운터 건너편 커다란 거울 속에 제 모습을 비춰본다. 거울 속의 그도 가만히 바라본단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나는 인생의 회로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버렸는지도 모른다.... 보면 볼수록 그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 처음 보는 다른 누군가처럼 느껴졌다.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자기 자신을 보면서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누군가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는 일. 멋진 일이다. 

그렇게 앉아 글을 읽는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여자를 끝내 못 알아보고 소설이 끝이 났으니 난 정말 잘 모르겠다. 작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 중요한 분기점이 몇 곳 있었다. 오른쪽이나 왼쪽,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오른쪽을 선택하거나 왼쪽을 선택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로서 현재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의 존귀함?을 말하려는 걸까? 여하튼 너무 얇고 가벼워서 휴대하기 좋았던 책 '일인칭 단수'는 묘한 생각거리를 줬다. 



가장 위에 있는 것은 가로등이 아니라 지는 햇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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