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백 개의 각운을 지니지 못한 자는/ 내기를 걸고 단언 건대/ 죽음을 맞으리라.」 -니체-
과연 ‘백 개의 각운’을 총알처럼 지니면 고통에 맞설 수 있으려나.
나에게 필요한 처방은 시시때때로 달라지니 ‘각운’의 주머니는 들어오고 나가는 흐름이 유연해야 하리라. 빠른 노화 때문인지 내가 내 것에 들어가기 위한 핸드폰 얼굴인식은 실패할 때가 더 많고, 내가 나임을 증명해야 열리는 문이 점점 많아진다.
나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끄적거린 독서 노트와 일기 같은 ‘백 개의 각운’을 주워 모으면 공허하고 고독해질 날들의 불쏘시개로 쓸 수 있겠지 하는 믿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시간 속에서 흐릿해지며 뒤섞이는 생각이나 경험들도 적어두면 생생해지겠지 하며 하루를 보내고, 그런 하루가 ‘백 개의 각운’과 함께 흐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를 소화하고 가벼워지겠지 하며 또 하루가 지난다.
모처럼 손주와 여러 날을 보내게 되어 흥이 넘치는 아이에게 맞춰 노는 것과 그 시간의 기억을 채집하는데 초집중했다.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키즈카페의 주도면밀한 장난감 왕국에서는 온갖 가상세계가 펼쳐지지만 또래 아이들의 개입으로 자주 주의가 흐트러진다. 반면 모든 사물이 재활용 장난감으로 변신하는 집안의 가상공간에서 아이는 더 신나고 위풍당당한 주인공이 된다. 사물들이 만나 스파크가 튀며 예측불허의 문이 열리는 그곳으로 넘어가면 스포츠 테이프가 뱀이 되고, 세면대 디딤 계단이 압박붕대와 만나 쓰레기차가 되고, 생수병 비닐이 핑크빛 파워레인저 안경이 된다. 아이는 블록 건물을 세우기가 무섭게 단박에 박살 내는 파괴력을 즐기며 매번 처음인 듯 꺄르륵 숨이 넘어간다. 삶에 저런 즐거움 만한 것이 없다. 즐거운 하루하루가 모여 부디 즐거운 인생이 되기를...
라면 박스에 손발 내밀 구멍을 내 거북이처럼 할머니네 집 마당을 기어 다니던 아이 아버지 모습이 오버랩 된다. 카드로 씨앗 뿌리기 놀이를 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이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에게 주말은 번번이 빨리도끝나 재우고 가려고 눕히는 순간 귀신같이 눈을 뜨곤 했다. 밤새 차로 돌려 곯아 떨어지고 난 다음날에는 전화기에 대고 “라불라불라불라” 소리치고 수화기를 귀에 대지도 않았지.
평일 아침엔 으레 출근한 엄마를 찾지 않고 살포시 안겨 할미와 어린이집엘 곧잘 가다가도 오밤중에 자다 깨 엄마 대신 이 할머니가 있는 걸 보고는 대성통곡을 하며 절규를 해 기어이 영화 보던 엄마를 소환하던 저 아이는 다 아는 것이다. 평일 낮엔 세상에 내어 주는 엄마를 밤과 주말에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생존투쟁, 그 분명한 감정 표현과 욕구의 쟁취가 눈물겹게 아름답고 건강하다.
일주일이 지나야 오는 엄마는 소리치고 울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안 어린 나이의 아이 아버지는 주말에라도 부릅뜬 눈으로 부모를 놓치지 않으려 붙잡다가 역시나 배신감의 월요일 아침을 맞이하곤 했겠지. 삶이 호락호락 놀이터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가며 현실의 마당에서 거북이로 변신하고 혼자 그림자놀이를 했을 거야.
손주 아이 모습에서 아이 아버지인 아들을 겹쳐보는 할미인 나는 회복기 환자처럼 그 시절의 상처 딱지를 떼며 중얼거린다. 고독과 떠남의 힘을 일찍이 일상으로 배운 너희들이 즐거운 존재로 인생 내내 건강하기를. 그 시절의 외로움과 빈자리가 독이 되어 인생을 시끄럽게 하지 않고 인생의 샛길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다운 자신에게 자주 머무르기를. 허무에 지지 않고 자기 삶을 살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