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말을, 이제는 내가 나에게 건넨다
사랑받기 위해, 나는 늘 잘해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괜찮은 아이’가 되는 법만 배웠다.
완벽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아이가 있었다.
잘하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잘해야만 했다. 그게 사랑받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믿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무엇을 해내든, 돌아오는 반응은 늘 비슷했다.
"그럼 그것도 못 해?"
"누구 딸인데."
"내가 어떻게 가르쳤는데."
단 한 번도 잘했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없다. 기특하다는 말도, 수고했다는 말도 내게는 허락되지 않는 언어였다. 칭찬은 언제나 더 높은 목표를 향한 채찍질로 대체되었고, 어린아이는 그것이 사랑의 표현이라고 학습했다.
결국 나는 결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고 느끼는지보다는 그들이 가르친 대로, 기대한 만큼 해냈는지가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나라는 존재는 눈에 보이는 결과를 통한 남들의 인정 속에서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점점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먼저 계산하게 되었다. 틀릴 것 같으면 아예 시작하지 않았고, 부족할 것 같으면 애써 모른 척하며 외면했다. 실패가 곧 존재의 부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척을 하면 상처받지 않을 줄 알았다. 그게 나를 지키는 일인 줄 알았다. 그런 식으로 나를 보호한다고 착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점점 더 잃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실수해도 돼, 괜찮아"라고 말해준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도 그 말을 할 줄 몰랐다. 작은 실수에도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완벽하지 못한 순간마다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모든 화살을 나에게로 향하게 하고 살았다.
그래서 여전히 자꾸만 다시 증명하려 하고, 다시 견뎌내려 한다. 어린 시절 듣지 못했던 그 말들을 찾아 헤매며, 남들의 인정 속에서 나의 가치를 확인받으려 애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나뿐이라는 것을. 엄마조차도 허락해주지 않았던 무조건의 사랑을, 이제는 내가 나에게 허락해야 한다는 것을.
명상을 시작하게 된 건 몸이 더 이상 못 버틸 정도로 고통스러워지고 난 다음이었다.
그리고 그 명상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그런 말을 들었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어도 충분해. “
”망가져도 괜찮아, 그런 건 아무것도 상관없어. “
그 순간 나는 멈췄다. 아득히 들려오는 그 목소리가 마치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어도 충분하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완벽하지 않아도 망가져도 상관없다고?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과는 너무 달랐다. 늘 무언가를 해내야만 존재할 수 있었다. 노력하고, 이겨내고, 견뎌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말이 자꾸만 내 안에 남았다. 조용한 숨결처럼, 작은 속삭임처럼 내 안의 긴장을 조금씩 풀어주었다. 매일 명상을 하면서 그 말을 듣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 말이 내 안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냥 있어도 괜찮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넌 이미 충분해. “
그 문장 앞에서 나는 울고 싶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온몸이 무너지듯 울었다.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그 말, 내가 나에게도 해본 적 없던 그 말이 처음으로 내 안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넌 그 자체로 충분해."
이 문장이 내 안에서 진짜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수십 년간 쌓인 패턴을 바꾸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오늘 나는 나를 꺼내 쓴다. 조금씩, 천천히.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주저하지만, 분명히 내 걸음으로.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나, 실패해도 여전히 사랑받는 존재임을 찾아가는 여정. 그 길 위에서 나는 비로소 나답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세상의 모든 기준에 맞춰 살려 애쓰는 이들에게. 당신도 그 자체로 충분히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