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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안메아 Oct 23. 2024

그녀는 집을 떠나고

14. 두 명의 정인


설날을 사흘쯤 앞두고 고등학교 때 친구 소개로 알게 된 정인이라는 이상한 녀석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방학 때부터 학교 앞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설에는 지방에 있는 집에 다녀가야 해서 설연휴 중 이틀만 오후 3시부터 9시까지 대신 일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난 아빠와 함께 떡국만 먹고 나면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겠다고 했다. 정인은 난처했던 만큼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서점에서 한 번쯤 일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살짝 설렜다. 그래서 약속한 날 한 시간이나 일찍 서점에 도착했다. 몇 번인가 책을 사러 갔던 적이 있어 낯설지 않았다.


"여기 정인이라고 아르바이트하는 학생 대신으로 일하러 왔는데요."


책을 사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던지 카운터에 앉아, 있는 대로 고갤 숙인 채, 만화월간지를 쥐 잡듯 읽고 있던 남자직원이 그제야 고갤 들고 날 쳐다봤다.                    


"제가 정인이라고 여기 아르바이트 생인데요."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네?"


… …. 그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나를 보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걔도 이름이 정인이었나?"


난 벌린 채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그는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삐걱대는 가구처럼 좌우로 기우뚱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와 반대쪽에 마주 보이도록 놓인 컴퓨터를 가리켰다.


"저기, 컴퓨터 앞에 앉아서 오늘 들어온 책 입력하고요. 아, 그건 내가 했지. 음,  손님이 찾는 책 있음 찾아주면 돼요."


난 대답대신 한숨을 쉬었다. 그는 내 창백해진 얼굴이 마음에 걸렸는지


"따라오세요."


라며 앞서 걸어갔다. 그리고 커서가 깜빡이는 모니터 앞에 서자,


"여기 저자명이라고 써둔 거 보이죠? 누가 와서 존 업다이크라고 한다면, 여기 조·온 어업, 다아이이크으라고 찍고 엔터 키를 누르면 보세요. 나오죠? 서명도 마찬가지 구요. 그렇게 찾아지면 뒤에 나온 번호를 보는 거예요. 여기 보세요. 달려라 토끼야 817.4번 영미소설이라고 되어있잖아요. 그럼 저쪽…."


그는 책장 꼭대기에 붙여둔 아크릴 표지판을 가리켰다. 하얀색 바탕에 파란 글씨로 씐 '영미소설'.


"이리 와서 보면, 영미소설에 쨘!"


그는 책꽂이 분리대에 작은 글씨로 종이에 써 붙인 번호를 가리켰다.


"768, 802, … 여기 보세요. 810에서 830이라고 쓰여 있죠? 이 걸로 찾아… 여기 있네요. 존 업다이크, 달려라 토끼야 됐죠? 이렇게 찾아주기만 하면 돼요."


난 고갤 끄덕이고 컴퓨터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는 불안한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다 말고 다시 돌아왔다.


"할 수 있어요."


내가 말했다.


"이름이나 알고 일하죠. 저는 박정인이고 스물 넷이고 여기서 일한 지 나흘째예요."


그가 말했다.


"홍정인 대신 온 최서은, 스물둘, 5분"


내가 말했다.


"설날이라 다들 영화나 보러 가지 서점에는 손님이 별로 없을 거예요."


그가 말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자 손님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자 손님은 잡지코너로 뚜벅뚜벅 걸어가 열심히 이것저것을 뒤적거리다가 휑하니 나가 버렸다. 우리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거 봐요."


그가 말했다. 잘 알았으니 그만 있던 계산대로 돌아가 읽던 책이나 마저 읽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서점이 한가하면 한 사람만 나와서 일해도 될 것 같은데."


내가 말했다. 학생 같아 보이는 여자 둘이서 손을 잡고 들어왔다.


"혼자 일하다가 화장실에라도 다녀오는 동안 셔터를 내릴 순 없으니까요."


그가 말했다.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나는 그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은 책을 찾아주고 돈까지 받아야 한다는 것.


"학생이에요?"


그가 물었다.


"네."


"나는 휴학생."


정인이 말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두 명의 정인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 알게 된 정인은 희원과도 아는 사이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안다니 나로서는 놀랄 일이었다. 그건 정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최서은과 안희원이 어떻게 친자매일 수가 있어?"


정인이 말했다.


"친자매 아닌데."


내가 대답했다.


"헐! 설마 배다른 형제, 출생의 비밀 뭐 그런 건 아니지?"


정인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난자와 정자가 모두 다르다고 하면 이해가 돼?"


내가 말했다. 호구조사를 실컷 해대던 정인은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이후로 두 번째 정인은 가끔씩 내게 연락을 취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인 경우도 있었고 까닭 없이 연락한 경우도 있었다. 그는 외모를 가꾸는 데 꽤나 심혈을 기울이는 편이었으며 자동차 유지비를 벌기 위해 서점에서 일한다고 했다.


연휴가 끝나고 첫 번째 정인이 대신 일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술을 한 잔 사겠다고 했다. 우린 번화가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위치한 '섬'이라는 술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정인은 또 다른 정인이 동석해도 괜찮겠냐고 물었고 난 그러라고 했다. 그들이 같이 온다는 건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같은 느낌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탁하고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손님이 붐비지 않아선지 앉아있던 몇몇 사람들이 내 쪽을 봤다. 난 바에 앉아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가방에서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를 꺼냈다. 이름 모를 가수가 스페인어로 끈적하고 애절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게의 주인인 듯한 중년 남자가 LP 오디오 가까이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감시카메라처럼 가게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끊임없이 시선을 움직이고 있었다. 구석 테이블에서 껴안다시피 한 남녀가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아저씨!"


옆 자리의 거나하게 취한 듯한 남자가 맥주 컵 이에 이마를 붙이고 손을 번쩍 들며 소리 질렀다.


"네."


바텐더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닦고 있던 유리잔을 내려놓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여기 맥주 두병 더 하구, 헨델의 사라방드."


헨델? 사라방드? 나는 그 남자를 힐끔 보았다. 그도 내 쪽을 봤다.


"아가씨!"


그의 목소리는 침처럼 끈적하고 쉰 냄새를 풍겼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가씨!"


그는 더 큰소리로 불렀다. 난 그를 쳐다봤다.


"혼자 왔어요?"


그의 표정은 목소리만큼이나 늘어지고 질퍽했으며 역겨웠다.


"아뇨. 기다리는 중인데요."


바텐드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손님, 사라방드는 곤란하겠는데요."


가게주인으로 보이는 중년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왜, 곤란하다는 거요? 헨델을 무시하는 거요?"


"아뇨. 저희 가게에 사라방드가 없어서요."


"저 딴따라들보다 헨델이 못하다는 거요? 음악의 어머닌데? 남자가 어머니가 됐는데도?"


그는 정말 그게 궁금한 것 같았지만 가게주인은 화가 나는 듯했다. 그러자 바에 있던 바텐더가 중년남자를 앉아 있던 맨 구석 테이블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주정뱅이 남자 앞에 주문한 맥주 두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긴 헨델도 없고 오케스트라는커녕 피아노 한 대도 없으니 제가 직접 불러드리죠. 밤밤, 바바바밤밤…."


"집어치워!"


주정뱅이가 말했다. 난 웃음을 참으려고 두 손으로 양쪽 뺨을 꽉 움켜잡았다.


"너 지금 나 놀려?"


주정뱅이가 눈을 부릅떴다.


"손님, 반말은 삼가 주십시오. 저의 가게는 손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 애쓰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사라방드가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부득이하게 제가 불러 심려를 끼쳐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바텐더가 정중하게 말했다. 주정뱅이는 바텐더의 사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킥킥거리더니,


"있다 올 테니 치우지 마쇼."


라고는 술집을 나갔다. 중년남자는 바텐더를 보며 화가 채 가시지 않은 듯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놀라셨죠?"


바텐더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요."


내가 말했다. 그는 내 손에 있는 책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바람의 그림자네요."


"읽어보셨어요?"


내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어서."


그가 말했다. 그의 귀 옆으로 구레나룻을 면도한 푸르스름한 흔적이 보였다.


"일행분은?"


그가 물었다.


"곧 올 거예요."


내가 대답했다.


"잠깐만요."


그는 내 등뒤에서 나가려는 손님을 발견하고는 카운터로 갔다. 나는 다시 책을 읽었다. 손님이 가고 나자 그는 다시 내 앞으로 왔다. 나는 책을 읽다 말고 그를 봤다.


"방해되나요?"


그가 물었다. 


"아니라고 대답해야겠죠?"


내 말에 그가 웃었다.


"스페인어는 왜 공부해요?"


내가 물었다.


"스페인에 가려고."


그가 대답했다. 멋진 대답이었다. 스페인에 가려고 스페인어를 공부한다는 건 당연한 대답이지만 멋진 대답이었다.


"스페인어 잘해요?"


내가 물었다.


"아직은. 하지만 언젠가는."


이것 역시 멋진 대답. 잠시 후 가게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주정뱅이 남자가 뭔가를 옆구리에 끼고 다시 들어왔다.


"이거요."


주정뱅이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LP 음반을 가게주인의 눈앞에 들이대며 말했다.


"뭐요?"


가게주인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사라방드."


주정뱅이 남자가 실쭉 웃으며 말했다. 가게주인의 굳어진 표정 뒤로 사라방드가 흘렀다. 전쟁통에 피난 가는 행렬이 저절로 연상되었다.


"먼저 와 있었네."


두 정인이 들어오며 말했다. 원래 알고 있던 홍정인은 검은색 폴라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서점에서 처음 알게 된 박정인은 금속성 광택이 나는 흰색 남방을 입고 있었다.


"응."


내가 말했다.


"테이블로 가자."


그들을 따라 반쯤 남은 맥주병과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일행이 왔네요."


칵테일 컵을 닦으며 바텐더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난 두 명의 정인을 따라 4인용 테이블로 갔다.


"맥주?"


검정 옷을 입은 정인이 물었다.


"그래."


내가 대답했다. 흰옷을 입은 정인은 이 만남이 어색한 표정이었다. 우린 몇 번인가 잔을 부딪히고 거품까지 깡그리 삼킬 동안 별 대화가 없었다. 헨델의 사라방드가 끝나자 주정뱅이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비틀걸음으로 바를 나갔다. 가게주인도 어디로 가버렸는지 없었다. 두 번째 주문한 술이 나오자 검정 정인이 내 잔과 흰 정인의 잔에 차례로 술을 따랐다. 흰 정인은 잔을 부딪힌 후 단숨에 잔을 비웠다. 


"팔이 왜 그래?"


검정 정인이 흰 정인에게 물었다. 5cm쯤 찢어진 걸 꿰맨 상처였다.


"시대상처"


흰 정인이 말했다.


"싸우다 다쳤군."


검정 정인이 말했다.


"그건 아니고, 친구가 시위를 하다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다기에 병문안을 갔는데 짜식이 정부를 향해 던진 꽃병에 내가 맞은 거야."


흰 정인이 말했다.


"헐."


내가 말했다.


"내가 들어가기 직전 경찰에서 다녀갔었나 봐."


 흰 정인이 말했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가 개구락지 목숨을 앗아 갔군."


검정 정인이 웃으며 말했다.


"목숨을 잃은 건 아냐."


흰 정인이 말했다.


"개구락지가 아니니까."


검정정인이 말했다.     


"집어 쳐!"


내가 말했다. 저만치서 유리잔을 닦고 있던 그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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