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연애생존법 - 그만두거나 새로 시작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의 눈치를 살피기 마련이야. 행여나 자신의 무엇에 대해 실망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죽이고 학대하고 울려. 그게 사랑이라고 믿지. 마치 팔 한쪽을 잡아 먹히고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온통 일그러진 얼굴과 젖은 머리칼을 하고서 학교 앞 카페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던 수는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너네 학교 앞에 오면 항상 책방에 들러. 그런데 문제는 책을 고를 때 도무지 자신이 서질 않는 거야. 내가 고른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그녀는 더 이상은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처럼 입술에 힘을 준 채 꼭 다물고 있었다.
"결국 가벼운 존재와 연애를 시작한 거야?"
내가 물었다. 그녀는 나를 뚫어져라 봤다.
"연애 시작한 사람처럼 보여?"
그녀가 물었다.
"연애에 호되게 당한 사람처럼 보여."
내가 대답했다.
"겨울은 연애를 시작하기에 좋은 계절이 아냐."
그녀가 말했다.
"왜?"
내가 물었다.
"걸으면서 얘기할 때 콧물이 너무 많이 나거든. 집에 오면 자괴감이 들어."
"시작했다는 거네."
내가 말했다.
"졸업하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거든."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비를 우습게 봤어. 내 꼬락서니를 봐."
그녀는 확실히 젖어 있었다. 우산 없이 온 거였다.
"감기에 걸리면 어쩌려고."
내가 말했다.
"헤어지기에 감기만 한 게 없어. 감기 때문에 아픈지 헤어져서 아픈지 알 수가 없거든."
그녀가 말했다.
"벌써 헤어져?"
내가 물었다.
"이미. 졸업하기 전에 뭐라도 해야 했다니까."
그녀의 말에 나는 참으려고 했지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제 사귀기 시작해서 이미 헤어진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대답할 기분이 아닌 듯 보였다. 졸업 전에 한 가지 경험은 확실하게 했으니 만족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수는 바람대로 며칠 동안 감기로 앓아누웠다. 그리고 감기가 끝났다는 소식과 함께 그녀로부터 A4지에 인쇄된 짧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나에게도 돌아갈 곳이 있다면 어쩌면 세상을 이해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다.
"편지 따윌 왜 쓰는지 모르겠어."
희원은 식탁에 앉아 수에게 답장을 쓰고 있는 나를 보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난 과거 따위에 연연하는 인간들은 체질적으로 이해가 안 돼. 다 늙어서 옛날 편질 펼쳐 들고선 호호 내가 옛날에 이랬지. 하려고 편질 모아두는 언니 같은 류 때문에 난 절대 편지 같은 건 안 써. 난 과거 따위에 집착하지도 않듯 미래 따윌 믿지도 않거든."
희원이 말했다.
"넌 미래에 살고 있고 과거에도 살고 있는 거야."
내가 말했다.
"4차원이냐?"
희원이 말했다.
"잘 생각해 보면 4차원은 3차원이고 3차원은 4차원이야. 영어에서 4 형식 문형을 3 형식 문형으로 바꿀 수 있는 것처럼. 결국 넌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살아가는 거야."
내가 말했다.
"벤츠 엔진을 단 BMW 같네.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대체."
희원이 말했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감의 남자와 헤어진 여자를 위해 해줄 말이 필요해."
내가 물었다.
"그거 알아? 헤어질 때는 더럽게 헤어지는 게 최고야. 소주 몇 병 마시고 토하고 위장병 걸리고. 그럼 빨리 끝낼 수 있거든."
희원이 말했다.
"한 문장이면 좋겠어."
내가 말했다.
"새 남친을 사귀자!"
… …!